북일 학교

한자 北一 學校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민족 교육 기관
설립자 이동휘, 양하구
개교 시기/일시 1917년
폐교 시기/일시 1920년
최초 설립지 훈춘현 대황구
현 소재지 훈춘시 대황구
정의

1917년 1월 이동휘 등이 훈춘현 대황구에 설립한 민족 교육 기관.

교육 목표(교훈 포함)

북일 학교는 왕청현 나자구동림 무관 학교의 전통과 훈춘 대황구동창 학교의 기반으로 설립되었기에, 독립군 양성·민족주의 함양·기독교주의 등을 교육 이념으로 내세웠다. 북일 학교는 독립군 양성·민족주의 함양·기독교주의 등을 교육 이념으로 내세웠다. 북일 학교는 학생들에게 민족주의 사상과 군사 지식을 전수하는 무장 투쟁을 위한 전초 기지로서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변천

1917년 1월 이동휘·김도연·양하구·김남극·양재환·양병칠·김하정 등은 왕청 나자구동림 학교의 후신으로 북일 학교를 건립하기로 합의하고 3개의 교사를 마련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초기에는 이동휘가 학교 설립과 운영에 관여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양하구와 김남극이 담당하였다. 1919년 북일 학교 교장 양하구가 일본 영사분관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후 김남극이 부교장직을 수행하였다. 1920년 10월 경신 참변 당시 부교장 김남극이 일본군에 의해 희생되면서 북일 학교도 문을 닫게 되었다.

교육 활동

북일 학교 개교 초기에는 이동휘를 따르며 간민회·동제회·결사대·동림 무관 학교 등에서 활동하던 30대 인사들이 교원을 맡았다. 이들이 이동휘를 따라 연해주로 떠난 뒤에는 훈춘 또는 대황구 출신들이 교원으로 충원되면서 훈춘 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북일 학교에서는 교육 취지에 따라 한국어·한국사·한국 지리·영어·러시아어·군사·체육·수학·물리·화학 등 12개 과목을 강의하였다.

북일 학교 구성원들은 1919년 용정 3·13 운동을 주도하였고, 이후 훈춘 일본 영사분관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는 등 무장 투쟁으로 전환해 갔다. 그 결과 교원과 학생들은 훈춘 군무부, 철혈 광복단, 한민회, 최진동의 대한 독군부, 홍범도대한 독립군북간도 독립군 단체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황

개교 초기 북일 학교는 학생 수 20여 명 정도였으며, 지속해서 학생 수가 증가하여 1918년에는 200여 명이 졸업하였다. 1920년 재학생이 300여 명일 정도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참고문헌
  • 장석흥, 「훈춘 북일 학교의 건립과 독립운동」(『한국학 논총』 31, 국민대 한국학 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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