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총영

한자 光復軍 總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항일 무장 단체
설립자 오동진
설립 시기/일시 1920년
해체 시기/일시 1922년
최초 설립지 요령성
현 소재지 요령성
정의

1920년 압록강 대안 서간도 안동현에 오동진 등이 조직한 항일 무장 단체.

개설

광복군 총영은 1920년초 관전현에 광복군이 조직되어 각 지에 군영이 만들어 졌는데, 상호 간 연락이 어렵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 대응하고자 오동진 등이 별도로 설립한 독립군 단체이다.

설립 목적

대일 항전 차원에서 실질적인 전투 부대를 양성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변천

광복군 총영은 3·1운동 직후 서간도에 조직된 여러 독립군 단체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단체 대표 김승학(金承學)·김승만(金承萬)·안병찬(安秉瓚)·김찬성(金贊聖) 등은 1919년 12월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서 회의를 열고 각 독립군 단체를 해체하고 통일기구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1920년 2월 김승학·안병찬·이탁 등이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이를 보고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만주에 직속으로 광복군 설치를 결정하고 부속기구로 민정 관장의 참리부(參理部), 군사활동 관장 사령부(司令部), 군영(軍營)을 설치토록 하였다.

그 뒤 1920년 초 관전현에 광복군이 조직되었는데, 참리부장에 조병준(趙秉準), 사령부 사령장에 조맹선(趙孟善)이 임명되었고, 변창근(邊昌根)·오동진(吳東振)··홍식(洪植)·최시흥(崔時興)·최찬(崔燦)·김창곤(金昌坤) 등이 각 군영의 영장(營長)을 맡았다. 그런데 군영이 각지에 분산되어 있어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 활동이 위축되고 부대 상호 간 연락이 어려웠다. 이에 1920년 7월 관전현에 주둔하던 광복군 제2영장 오동진이 자신의 부대를 광복군 총영으로 개칭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광복군 총영은 1920년 일본 군경과 78회 교전하였고, 56개 소의 일제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면사무소 및 영림창 20개소를 불태웠고, 일 경찰 9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광복군 총영은 일본인에게 “우리들은 천하의 대의와 국가 위급함을 생각하여 제군에게 고한다. 너희들에게 고하노니, 너희들은 무슨 원한이 있어서 우리 동포들을 해치느냐. 속히 물러가지 않으면,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네 생명과 자손을 보존하고 싶거든 속히 물러가라”라는 내용의 경고문[對日人警告文]을 발표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현황

광복군 총영 영장은 오동진, 경리부장은 조맹선, 참모부장은 이탁이 선임되었다.

의의와 평가

광복군 총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서간도 독립군 단체의 통일 기관으로 대한통의부(大韓統軍府)가 조직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 애국동지원호회 편, 『한국독립운동사』(1956)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3(정음문화사, 1968)
  • 김준엽, 김창순, 『한국공산 주의 운동사 4』(청계연구소, 1986)
  • 윤병석 외, 『중국 동북지역 한국독립운동사』(집문당, 1997)
  • 윤대원, 「서간도 대한광복군사령부와 대한광복군총영에 대한 재검토」(『한국사연구』133, 한국사연구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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