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립회

한자 共立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 단체
설립자 강봉주|김형재|김성백
설립 시기/일시 1909년 2월
개칭 시기/일시 1910년 10월 16일
최초 설립지 흑룡강성 하얼빈
정의

1909년 하얼빈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개설

1908년 이강(李剛)의 명을 받은 대동통신원 김형재(金衡在)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와서 김성백(金成白), 김성옥(金成玉)과 협의하여 1909년 2월 한인 자치체 명의로 하얼빈 공립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설립 목적

이 단체의 설립 목적은 동포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환난을 당하였을 때 서로 구제하며 생업을 넓혀서 충실하게 지식을 발달시키는 것이었다.

변천

1909년 2월 설립 후 1910년 10월 16일 국민회로 개칭하였으며, 그 취지는 공립회와 동일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공립회는 설립 목적과 정관에 따라 하얼빈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자치 조직인 한민회를 세웠으며, 한인 교육 기관인 동흥 학교도 설립하였다. 회원들 간에 상부상조하는 공제 정신과 자립 정신을 키웠으며, 신문 발행을 통해 애국 사상을 육성하였다. 이를 통해 하얼빈 지역의 항일 운동이 점차 싹트기 시작했다.

현황

공립회 입회금은 1인당 30전이며 회비는 매달 10전으로 정했다. 회원으로 생업이 없는 자에게는 5원을 지불하여 이용하게 한 후 생활이 나아지면 돌려받았다. 회원으로 아편 중독 및 술중독자의 경우에는 1원 이상 3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고 규정하였다. 공립회의 회원은 53명이었는데 회장에 강봉주, 부회장 윤근성, 총무 최상준, 서기 김익지, 회계 심기원이었으며, 회원 대부분은 노동자였다. 국민회로 조직이 개편된 후에는 회장 정대호, 평의원 김일택 등이 공립회를 운영하였다.

의의와 평가

공립회는 하얼빈 한인 사회의 항일 운동을 이끌었으며, 1910년 국민회로 개칭되면서 새로운 단계의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 『불령단 관계 잡건-조선인의 부-재만주의 부1』(합이빈 재류선인상황, 1910년 12월 24일)
  • 서명훈, 『하얼빈시 조선 민족 백년 사화』,(민족 출판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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