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義烈團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길림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항일 비밀 결사 |
|---|---|
| 설립자 | 김원봉 |
| 설립 시기/일시 | 1919년 11월 10일 |
| 해체 시기/일시 | 1929년 12월 2일 |
| 최초 설립지 | 길림시 |
1919년 11월 길림성 길림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조직된 항일 비밀 단체.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길림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는 조선독립군정사(朝鮮獨立軍政司, 일명 길림군정사)로 개칭하고 조직을 확대,·개편하였다. 하지만 조선독립군정사는 무기 확보와 군자금 모금 등의 어려움에 무장투쟁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적은 인원으로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의열 투쟁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이에 황상규(黃尙奎)는 1919년 3월 초, 남경(南京)금릉대학(金陵大學)에 유학 중인 처조카 김원봉(金元鳳)을 불러서 그해 5월 초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의 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하도록 했다. 이를 기회로 김원봉(金元鳳)은 폭탄 제조 기술을 배우는 한편, 동지를 모았다. 규합한 동지는 김옥(金玉, 일명 金相潤)·강세우(姜世宇)·이성우(李成宇)·이종암(李鍾岩, 일명 梁健浩)·서상락(徐相洛, 일명 徐永林)·신철휴(申喆休, 일명 申愚童)·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 등이었다. 그해 6월경 이들은 비밀결사를 통한 의열 투쟁을 결의하면서 의열단이 조직되었다.
의열단은 항일 비밀결사로서 국내와 중국 관내에서 암살·파괴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내 동포들의 독립 정신을 환기토록 하는 한편 이를 통해 국내외 한인을 중심으로 혁명을 촉발함으로써 민족 독립과 조국 광복을 이루고자 했다.
황상규·김원봉(金元鳳)·이성우·이종암 등은 1919년 6월경 비밀결사를 통한 의열 투쟁을 결의하였고, 그해 7월 김원봉(金元鳳)·이종암은 상해로 가서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 단원들과 약 3개월 동안 폭탄 제조법을 배운 후 그해 10월 길림으로 돌아왔다. 이후 신흥 무관 학교 출신 동지들과 중국으로 망명한 곽재기(郭在驥)·윤세주(尹世胄)·윤치형(尹致衡) 등이 길림에 모였다. 이들은 길림성 파호문(巴虎門) 밖 중국인 반씨(潘氏) 집에서 폭탄 제조법을 습득한 뒤, 11월 9일 밤, 그동안의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조직 운영 방침, 활동 방향 등을 논의한 끝에 이튿날인 11월 10일 의열단을 창립하였다. 창립 멤버는 김원봉(金元鳳)을 비롯하여 강세우·곽재기·김상윤·배동선(裵東宣)·서상락·신철휴·윤세주·이성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 외 1명 등 13명이었다.
의열단은 1920년대 국내와 중국 관내에서 일본 고관 암살, 관공서 폭파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의열단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1922년부터 단원 수가 급증하여 1923년에는 15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독립운동 세력들 간에는 이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때 1923년 1월 신채호(申采浩)가 쓴 「조선혁명선언」 발표 이후 의열단은 ‘혁명단체’로 자리매김하였고, 단원들 스스로도 ‘혁명가’임을 자처하였다.
하지만 의열 투쟁에 따른 단원들의 희생이 커지는 한편,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까지 단원에 가입하면서 내부에서 사상 논쟁이 불거지면서 존폐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의열단은 기존 노선을 재검토한 뒤 의열 투쟁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민중의 혁명역량에 기반한 조직적인 무장투쟁 노선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이에 1929년 12월 의열단은 스스로 해체를 선언하였다.
의열단은 설립 당시 ‘공약 10조’와 ‘5파괴’·‘7가살(可殺)’ 행동 목표를 기본규약으로 삼아 활동을 전개하였다. ‘공약 10조’는 ①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초회(招會)에 필응(必應)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 등이었다.
행동 목표 가운데 암살 대상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 7가지 경우로 정하였다. 파괴 대상으로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 기관 등이었다.
의열단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1920년 3월 의열단 단원 곽재기·이성우·신철휴·윤세주 등을 처음으로 국내에 잠입시켜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경성일보사 등을 폭파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사전에 계획이 탄로 나는 바람에 그들은 서울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첫 번째 활동이 실패하였지만, 의열단은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의 부산 경찰서 폭파와 서장 암살, 그해 12월 27일 최수봉의 밀양 경찰서를 폭파, 1921년 9월 김익상의 조선 총독부 청사 폭파 의거, 1922년 3월 김익상·오성륜·이종암 등의 상해 황포탄 의거, 1924년 1월 도쿄 니주바시 폭탄 투척 의거, 1926년 12월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조선식산은행 폭탄 투척 의거 등의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