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龍海 古墳群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유적/고분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용수진 용해촌 |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발해 |
| 성격 | 고분군 |
|---|---|
| 양식 | 석실봉토묘 |
| 크기 | 200m[길이]|50m[너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2년 |
| 소재지 |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용수향 용해촌 |
| 모형 전시처 |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용수향 용해촌 |
길림성(吉林省)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화룡시(和龍市) 용수향(龍水鄕) 용해촌(龍海村) 동쪽에 있는 발해 시대의 고분군.
용해 고분군은 용수향 용해촌 2대(隊)의 남쪽 약 400m 지점에 있는 용해 중학교 서북 모서리와 동부의 논 가운데에 위치한다. 두도(頭道)-복동(福洞) 간 도로가 고분군 중간을 남북으로 관통한다. 고분군 북쪽의 용해촌 1대 소재지에는 고분과 동일 시기에 축성된 잠두성(蠶頭城)이 있고, 서쪽 약 500m에는 용두산(龍頭山)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다.
1982년 5월 연변 박물관은 학교 서북 모서리에서 7기의 무덤을 정리 조사한 바 있다.
용해 고분군은 동서 길이 약 200m, 남북 너비 약 40∼50m이다. 이 고분군은 연대가 오래되어 어떤 곳은 이미 논으로 개간되었거나 학교가 지어졌기 때문에 대다수 무덤은 심각하게 파괴되어 있다. 다만 학교 동쪽의 논과 학교 서북 모서리에는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무덤 10여 기가 남아 있다.
연변 박물관에서 정리한 용해 고분군 7기의 무덤은 모두 석실 봉토묘이나 봉토는 심하게 유실되었으며, 묘정석(墓頂石)은 대다수 이미 밖으로 노출되었다. 무덤은 밀집하여 분포하는데 묘 사이의 간격은 일반적으로 2m 정도이며, 일부 무덤들은 상호간 묘역을 침범하고 있다.
무덤의 구축 방법은 먼저 장방형의 토광을 파고, 약간 가공한 돌[石塊]이나 큰 강자갈[河卵石]로 동·서·북 등의 세 벽을 층층이 쌓았는데 묘실 내벽(內壁)은 비교적 정연하다. 묘벽(墓壁)은 어떤 것은 6층으로 쌓고, 어떤 것은 3층으로 쌓았으며, 묘실은 깊이가 균일하지 않다. 묘 벽석과 토광벽 사이의 빈 공간은 어떤 것은 흙으로, 어떤 것은 작은 강자갈[河卵石]과 흙으로 함께 섞어서 채웠다. 묘실 남단의 동서벽 내측에는 각기 1개의 돌[石塊]을 놓아 무덤의 문협[門頰]을 이루었다. 문협의 남쪽에는 어떤 것은 짧은 묘도(墓道)가 축조되었고, 어떤 것은 묘도 없이 묘문만 설치되었다.
묘구(墓口)는 돌[石塊]을 쌓아 막거나 1·2개의 장대석을 수직으로 세워 막았다. 그 가운데 수직으로 세운 석판으로 막은 무덤이 돌[石塊]로 층층이 쌓아 막은 무덤을 파괴한 것으로 보아 전자가 후자에 비해 시기상 약간 늦다고 볼 수 있다. 묘실 바닥[墓底]은 대다수 생토면 위에 한 겹의 황사토(黃砂土)를 깔았으며, 묘실 바닥(墓底)의 중간에 작은 돌(石塊)로 석대(石臺)[棺床]를 쌓기도 했다. 묘실의 정부(頂部)는 모두 크기가 다른 몇 개의 석판으로 평평하게 덮어 천정을 봉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석판은 길이 2.7m, 너비 1.74m이다.
정리한 7기의 무덤 가운데 단인장(單人葬)은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을 합장한 무덤이 6기인데 그 가운데 두 기는 두 사람이 1차장으로 남녀 합장이고 나머지 4기는 한 사람은 1차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2차장이다. 1기는 4인 합장묘인데 1구(具)는 1차장, 3구(具)는 2차장이다. 1차장의 인골은 모두 묘실 중앙부에 위치하고 앙신직지(仰身直肢)이며, 2차장은 모두 유골을 1차장한 인골의 머리 부근 또는 다리 부근에 쌓아 놓았다.
용해 고분군의 부장품은 매주 적은데, 토기 2점, 청동기 2점, 수정 구슬 2점, 마노(瑪瑙) 구슬 1점, 철제 고리[鐵環] 1점, 철제 못[鐵釘] 29매 등이 출토되었다. 도관[陶罐]은 1점으로 온전한 형태이며, 니질 회도(泥質灰陶), 오므라든 입[斂口], 넓은 어깨[寬肩], 볼록한 배[鼓腹], 평평한 바닥[平底]이다. 구연 부분에는 1줄의 선문[弦紋]이 새겨져 있으며, 어깨와 복부가 만나는 곳에는 2줄의 선문[弦紋]이 새겨져 있다. 입지름[口徑]은 6.1㎝, 최대의 배지름[腹徑] 12.5㎝, 바닥직경[底徑] 6.8㎝, 전체 높이 8.1㎝이다. 단경병(短頸甁)은 1점인데 기본적으로 완형으로 구연부 및 복부가 약간 손상되었다. 협사 황갈도(夾砂黃褐陶)로 물레 제작[輪製]이며, 나팔모양 입[喇叭口], 짧은 목[短頸], 넓은 어깨[寬肩], 볼록한 배[鼓腹], 작은 평평한 바닥[小平底]이다. 구연 바닥부에는 1줄의 선문(弦紋)이 새겨져 있으며, 경부(頸部) 이하는 문질러서 표면이 매끄럽다. 입지름[口徑]은 12.3㎝, 최대 배지름[腹徑] 18.5㎝, 바닥직경[底徑] 8.5㎝, 전체 높이 22.8㎝이다.
동제 비녀[銅釵]는 1점인데 ‘∩’자형이며, 비녀 머리[釵首]는 ‘山’자형을 띠며, 3개의 철점(凸點)이 마치 못대갈 모양과 유사하다. 상면에는 각기 6판화문(六瓣花紋)이, 가닥이 꺾이는 부분[折股部分]에는 4판화문(四瓣花紋)과 권운화문(卷雲花紋)이 새겨져 있다. 전체 길이 14㎝이다. 동제 팔찌[銅鐲]는 1점으로 타원형에 입구가 막혀 있으며, 안은 평평[平直]하고 밖은 호형을 이루고 있다. 단면은 ‘D’형을 띠며, 긴 지름[長徑]이 6.9㎝이고 짧은 지름[短徑]이 6.2㎝이며 두께는 0.3㎝이다. 수정 구슬[水晶珠]은 2점으로 원구 모양[圓球狀]과 타원형구 모양[橢圓形球狀]이다. 투명하고 맑으며, 제작이 정교하다.
철제 고리[鐵環]는 1점인데, 덮개[擋頭]로 인해 철제 고리와 순정(榫釘)[고리를 매달은 부분]으로 조성되었으며, 철제 고리는 순정을 덮개 중간에 부가하였다. 덮개는 둥근 모양으로 이미 부식되었으며, 철제 고리 단면은 마름모형[菱形]이며, 고리 지름은 6.2㎝이다. 철정은 29매이며, 5기의 무덤에서 나뉘어 출토되었다. 못의 몸은 사각형이며, 대가리 부분은 납작하게 꺾였다.
용해 고분군의 무덤 형식은 발굴한 7기의 무덤을 통해 보면 묘실은 모두 지하에 조성되었으며, 묘실은 돌(石塊)로 층층이 쌓아 벽체를 만들었고, 위에는 대석판을 덮어 천정을 봉하였다. 매장 방식은 2인 또는 다인장, 2차장 등으로 발해 중소형 석실묘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무덤에서 출토한 토기·청동기는 화룡현(和龍縣) 팔가자(八家子) 북대(北大) 발해 무덤에서 출토된 기물과 서로 유사하므로 발해 고분군이 확실하다.
용해 고분군의 범위는 비교적 크고,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으며, 무덤은 비교적 작다. 비교적 장시간에 거쳐 형성되었다. 고분군 북쪽 400㎞의 잠두성(蠶頭城)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데 잠두성 주민의 공동 묘지일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