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馬都山 戰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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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발해 |
| 관련인물/단체 | 무왕, 장문휴, 대문예, 현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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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생|시작 장소 | 하북성 산해관 부근 |
733년 발해가 마도산(馬都山)에서 당나라 군과 싸운 전투.
발해 제2대 무왕 때, 흑룡강 하류에 있던 흑수 말갈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당나라와 대립하였다. 726년 당나라는 발해의 배후인 흑수 말갈에 대해 흑수주를 만들고 장사(長史)를 두어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무왕은 흑수 말갈이 당나라와 연합해 발해를 공격할 것을 염려해 아우인 대문예에게 임아(任雅)와 함께 흑수 말갈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대문예가 흑수 말갈을 공격하는데 반대해 당나라로 망명하고, 당으로부터 좌효위 장군(左驍衛將軍)이라는 벼슬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728년 당나라가 흑수 말갈을 유주 도독(幽州都督)의 관할 하에 두자 발해는 당과의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하게 되었던 직접적인 배경은 대문예의 망명 사건이었다. 그리고 730년 이후 거란과 해(奚)가 돌궐과 함께 당나라를 공격했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732년 9월 무왕은 장문휴(張文休)에게 수군을 주어 당의 등주(登州)를 치게 하였다. 발해군은 등주 자사 위준(韋俊)을 죽이고, 등주를 초토화시킨 후 바로 철수하였다. 이듬해 돌궐의 원병을 얻어 당나라를 공격하던 거란을 도와 요서(遼西) 지방의 마도산(馬都山)[지금의 하북성 산해관 부근]까지 공격하였다.
『신당서』의 「오승자전」에 발해의 대무예[무왕]가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을 점령하자, 발해군에 맞선 오승자가 당나라군을 움직여 요긴한 길목을 막고 큰 돌로 참호를 만들어 400리에 걸치게 했다고 하였다.
『자치통감』에는 당나라 현종이 대문예를 유주(幽州)[지금의 북경(北京)]로 보내 군사들을 징발하여 싸우게 하는 한편, 유주 절도사로 하여금 ‘하북채방처치사’를 겸하게 하고 상주, 낙주, 패주, 기주, 위주 등 16개 주와 안동 도호부[평주]의 병력까지도 통솔케 했다고 하였다. 사료의 기록을 통해 당나라가 발해의 공격에 대해 얼마나 긴장했던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마도산 전투는 발해가 등주 외에 당시 국제 정세를 잘 이용하여 당나라를 공격하였다는 점, 즉 발해와 당나라와의 전투가 단순히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만이 아닌 돌궐과 거란의 이해 관계도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도산 전투는 발해군이 당나라 조정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일종의 전면전과 같은 정벌 전쟁을 펼친 셈이었다. 즉 발해군이 요서의 마도산에 진격한 것은 상당히 위협적인 기습 작전으로 평가된다. 당시 당나라가 400리에 걸친 참호를 만들 정도로 발해의 기습전 능력이 엄청났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발해군의 지상 전투 능력이 당나라 부대를 긴장시킬 만큼 수준급이었음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해상을 통한 등주 전투와 육전을 통한 마도산 전투를 통해 당시 발해는 고구려에 견줄만한 군사 강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발해의 대대적인 대당 공격전을 통해 발해가 당나라의 종속국이 아니라 당과 대등한 자주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