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령 전투

한자 天門嶺 戰鬪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발해
상세정보
관련인물/단체 이해고, 걸사비우, 대조영, 이진충
발생|시작 시기/일시 698년
종결 시기/일시 698년
발단 시기/일시 696년 5월
발단 시기/일시 697년
발생|시작 장소 미상
종결 장소 미상
정의

698년 발해대조영과 당 장수 이해고(李楷固)가 천문령(天門嶺) 일대에서 싸운 전투.

역사적 배경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대조영은 가속(家屬)을 이끌고 영주(營州)로 옮겨가 살았다. 요동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하는 영주(營州)[현 조양(朝陽)]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영주에는 거란, 해, 실위, 말갈 등 여러 부족이 섞여 사는 기미주였는데 여기에 고구려 유민들도 많이 있었다.

696년 5월, 거란 추장 이진충(李盡忠) 등이 폭정을 일삼던 영주 도독 조문홰(趙文翽)를 살해하고 거란의 독립을 선언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영주에 살던 고구려 유민 가운데 일부 집단이 걸걸중상(乞乞仲象)[대조영의 아버지]과 걸사비우(乞四比羽)의 지휘 아래 탈출해 요동에 정착하였다. 걸걸중상은 당으로부터 진국공으로 책봉하겠다는 회유를 물리치고 왕조 부흥의 길로 나갔다가 병사(病死)하였다. 한편 당(唐)과 밀약을 맺은 돌궐 추장 묵철(默啜)이 이진충의 배후를 공격하여 이진충을 죽이자, 고구려 유민들은 요하(遼河)를 건너 고구려 옛 땅으로 달아났다.

경과

697년 이진충이 죽자, 당나라는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측천무후가 우옥검위 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에게 명하여 남은 고구려 유민을 토벌하게 하였다. 698년 이해고가 천문령을 넘어 대조영을 뒤쫓았다. 대조영은 천문령에서 이해고를 맞아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이때 대조영과 힘을 합하여 싸우던 걸사비우가 이해고에게 살해되는 등 희생자도 많았다.

결과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 대조영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동쪽 멀리 이동해서 나라를 세웠다. 또한 영주 지역에 남아 지방군에 편제되어 중급 지휘관이 된 고구려 유민들도 있었다. 당시 동만주 일대에는 과거에 고구려로 편입되어 오랫동안 고구려 주민으로 살았던 말갈 등이 고구려 멸망 후 미약해진 채 흩어져 있었다. 동만주 지역에 분산 거주하면서 재기를 기약하던 이들은 영주로부터 대조영 등의 고구려 유민들이 집단 탈출해 오고 천문령에서 당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자 곧 모여 들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으로 이루어진 대조영 집단은 지금의 돈화(敦化) 지방인 동모산(東牟山)에서 발해의 전신인 진(震)을 건국했고, 곧 고구려 고토의 대부분을 회복했다. 발해 제2대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처하였다.

의의와 평가

천문령 전투는 대조영발해를 건국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천문령의 현재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청건륭제 때 편찬한 『만주원류고』에는 천문령이 승덕현(承德縣) 서쪽 경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규철은 오늘날 중국의 혼하(渾河)와 휘발하(輝發河)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곳은 후일 발해에서 거란으로 가는 영주도(營州道)의 길목이었다.

참고문헌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 한규철, 『발해의 대외 관계사』(신서원, 1994)
  • 송기호, 『발해 정치사 연구』(일조각, 1995)
  • 김종복, 『발해 정치 외교사』(일지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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