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구태

한자 尉仇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길림성/요녕성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부여
상세정보
성격 왕족
성별
정의

중국 동북지역에 있었던 고대국가인 부여의 왕.

개설

위구태는 생몰년 미상의 부여 왕이다. 『삼국지』에 의하면 요동에서 공손탁(公孫度)이 세력을 떨쳤던 190~204년에 부여의 왕으로 있었다. 후한 말기 공손탁 세력이 강성해지자 부여는 공손탁에 귀부하였고, 위구태는 공손탁의 종녀(宗女)와 혼인을 하였다. 후한과 우호적인 관계였으나 고구려와는 대립적인 활동을 했다.

한편 위구태가 왕으로 있던 부여는 대소왕(帶素王)의 경우를 통해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과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에 나오는 북부여와 동일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가계

부여왕 간위거(簡位居)의 아버지이다.

활동 사항

위구태(尉仇台)는 『후한서』에도 관련 기록이 나온다. 『후한서』에는 위구태가 부여왕의 태자로서, 120년에 사신으로 후한을 방문했다고 나온다. 당시 후한 황제였던 안제(安帝)는 그에게 인수(印綬)와 금색 비단을 내리는 등 융숭히 대접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과 부여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바, 다음 해인 121년 고구려태조왕이 마한과 예맥의 병사를 동원하여 후한현도군(玄菟郡)을 포위하자, 위구태가 직접 2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후한군과 합세하여 고구려군을 격파하였다. 136년에는 부여 왕으로서 직접 한(漢) 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위구태가 죽자 아들 간위거(簡位居)가 왕위를 이었다. 그런데 『삼국지』에는 위구태가 공손탁(公孫度)이 활동하던 190~204년 무렵 부여의 왕이었다고 나온다. 즉 태자로서 활동하던 시기와 부여왕인 시기가 거의 60~70년 정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삼국지』와 『후한서』에 각각 위구태가 나오지만 활동시기에 차이가 커 동일인이라 보기 힘들다. 『후한서』에 의하면 167년에 부태왕(夫台王)이란 왕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오고 있어 위구태는 그 이전에 왕이었다가 서거한 것으로 보고 있다. 『후한서』와 『삼국지』 두 사서에 나오는 위구태는 동일인이 아닌 다른 인물의 혼동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와는 다른 방향에서의 논의도 있다. 위구태의 이름은 그냥 구태(仇台)로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건국시조인 구태(仇台), 또는 우태(優台)와 관련성이 있다고 보는 설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구태와 『삼국사기』의 구태, 또는 우태와도 활동시기에 차이가 있다. 이에 따라 구태와 위구태는 동일인이 아니라 부자 혹은 조손(祖孫)의 이름을 혼동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 고구려의 태조왕과 동천왕은 날 때부터 눈을 뜨고 사람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고 하므로, 태조왕의 이름인 궁(宮)을 따서 동천왕에게 위궁(位宮)이란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이런 예에 비추어 부여왕인 위구태도 원래는 ‘구태’였는데 선조 중 누군가와 닮았다 하여 ‘위구태’라 했다고 본 것이다.

참고문헌
  • 『후한서(後漢書)』
  • 『삼국지(三國志)』
  • 『삼국사기(三國史記)』
  • 이병도, 「부여고(夫餘考)」(『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 노태돈, 「夫餘國의 境域과 그 變遷」(『國史館論叢』4, 1989)
  • 이도학, 「고구려와 부여 관계에 대한 재검토」(『고구려의 역사와 대외관계』, 서경, 2006)
  • 이종수, 「고구려의 부여진출과정 연구-군사적 충돌을 중심으로」(『고구려연구』21, 2006)
  • 김정배 외, 『부여사, 단군, 부여』(동북아역사재단, 2007)
  • 윤용구 외, 『부여사와 그 주변』(동북아역사재단, 2008)
  • 송호정, 『처음 읽는 부여사』(사계절,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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