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帶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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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 지역 | 길림성 |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부여 |
| 성격 | 인물/왕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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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 |
중국 동북지역에 있었던 고대국가인 부여의 왕.
부여의 왕으로 성은 해(解)이고 이름은 대소(帶素)다. 고구려 건국시조인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태자였다. 금와왕 사후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정치적 갈등세력이던 주몽집단의 이탈 이후 고구려와 대립을 계속하다가 대무신왕의 공격을 받아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대소 사망 후 부여의 일부 세력은 압록곡으로 달아나 갈사국을 세웠고, 일부 집단은 고구려에 투항했다.
한편 대소의 부여는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신화에는 동부여라고 나온다. 동부여는 광개토왕비에도 나온다. 동부여에 대해서는 고구려 왕도를 기준으로 동쪽에 존재했던 부여라고 보는 설이 다수이나, 부여사적 입장에서 송눈평원(松嫩平原)에 있던 탁리국(橐離國)이 북부여였고, 여기에서 분리된 예족이 길림(吉林) 일대에 세운 나라가 동부여라고 보는 설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대소 관련 기사에 부여가 북방에 위치한 나라임을 의미하는 구절이 나온다. 또 광개토왕비문과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에 주몽의 북부여 출자설이 기록되어 있어, 이것이 5세기 고구려 왕실의 공식 입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해부루-금와-대소로 이어지는 계통을 달리하는 동부여 출자설은 후대에 들어간 것이고, 실제 대소가 왕으로 있던 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 있던 북부여였다고 볼 수 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고고학적 상황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부여금와왕의 장자이다. 동생이 6명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갈사왕(曷思王)이다.
대소는 금와왕(金蛙王)의 맏아들이다. 대소가 태자였을 때 부여 궁궐에 유화부인과 아들 주몽(朱蒙)이 함께 거주했다. 대소에게는 여섯 동생이 있었는데 군사능력과 다른 기본 자질 면에서 모두 의붓동생인 주몽보다 못했다. 이에 왕위계승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한 대소 등이 주몽을 핍박했고 나중에는 후환을 없애고자 죽이려 했다. 주몽이 이를 알고 친구들과 함께 부여에서 탈출하여 압록강 중류유역에 이르러 기원전 37년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대소는 금와왕이 기원전 24년에 서거하자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6년(유리왕 14) 대소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인질을 교환하고 화친할 것을 제의하였다. 주몽과 마찬가지로 부여에 있다가 고구려로 내려온 유리왕은 부여의 강대함을 잘 알아 거절하지 못하고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태자가 두려워하여 가기를 거부함으로써 인질교환이 무산되었다. 이에 노한 대소왕이 5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마침 큰 눈이 내려 얼어 죽는 자가 속출하자 퇴각했다. 서기 9년 대소는 부여를 예로써 섬길 것을 유리왕에게 강요했다. 하지만 지략이 뛰어난 고구려 태자 무휼(無恤)[대무신왕]과의 외교적 담판에 밀려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서기 13년에 대소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학반령(鶴盤嶺)에 복병을 둔 것을 알지 못해 무휼의 고구려군에 대패했다.
서기 20년(대무신왕 3)에 대소왕은 머리는 하나이고 몸뚱이는 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며, “까마귀는 검은데 이제 붉게 변했고, 머리는 하나인데 몸은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라고 하며, 고구려를 위협했다. 그러자 대무신왕은 “검은 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인데 이것을 갖지 않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을 알 길이 없다.”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대소는 놀라 후회했다.
서기 22년 2월 대무신왕이 부여를 치고자 병력을 이끌고 부여 남쪽에 이르러 진을 쳤다. 대소는 고구려군이 진용을 갖출 틈을 주지 않으려고 기습공격을 했다. 하지만 자신이 진흙수렁에 빠져 움직이지 못했다. 이때 고구려 장수 괴유(怪由)가 나아가 대소의 목을 쳤다. 부여군은 대소가 전사한 후 기운이 꺾였지만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군을 두어겹으로 에워쌌다. 부여군이 포위한 채 버티니 고구려군의 군량이 다 떨어졌다. 어찌할 바 모르던 대무신왕이 천신에게 기도하니 큰 안개가 끼어 일주일 동안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대무신왕은 그틈을 타 짚으로 사람을 만들어 무기를 쥐어놓고 사잇길로 도망하여 겨우 고구려로 돌아갈 수 있었다.
대소왕이 전장에서 서거하자 부여는 한동안 혼란을 겪게 되었다. 동생 중 한 명은 22년 음력 4월에 100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압록곡으로 내려갔다. 마침 사냥을 나온 해두국왕을 죽이고 백성을 빼앗아 갈사수(曷思水)가에 새로 나라를 세우고 갈사왕(曷思王)이 되었다. 또 왕의 종제(從弟)는 1만 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대무신왕은 그를 왕으로 봉하고 락(絡)이란 성을 하사하였고 그 무리를 연나부에 안치하였다. 대소의 죽음과 주요 왕실 세력의 이탈은 부여의 국력 쇠퇴와 함께 오랜 기간 우위를 점했던 고구려와의 관계가 역전되는 상황을 초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