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渤海 3省 6部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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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발해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7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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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중앙 정부 기구.
발해 통치 기구의 기본 구조는 중국 역사서인 『신당서』 발해전에 관련 기록이 전한다. 발해전의 관제(官制) 기사는 835년(함화 5) 발해를 다녀간 당나라 행군마사 장건장(張建章)이 자기의 견문을 기록한 『발해국기』[현재 전하지 않음]에 따른 것이다. 그 이외의 문헌들에도 이 시기를 전후한 무렵의 발해 관청이나 관직 명칭들로서 발해전 기록들과 약간 차이가 나는 것들이 있다. 이를 토대로 할 때 발해 3성 6부제의 관제 내용은 제3대 문왕 대에 일단 기본적으로 정착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제정된 관청과 관직의 명칭에는 여러 가지 다른 이름도 있었던 것 같다.
발해는 넓은 영토를 다스리고 효율적인 대민 통치를 실시하기 위하여 발해 이전의 고대 국가인 고구려가 그랬듯이 중국의 율령 체제를 도입하고 중앙 집권을 지향하여 완비된 통치 제도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발해는 황제를 정점으로 하여 전제적이고 자주적인 특징을 갖는 중앙 정치 체제를 완성하였다.
발해의 중앙 기구 확립은 점진적인 발전 과정을 거쳤다. 건국 초기의 조직과 기구의 설치 상황은 확인할 수 없지만, 고왕(高王)이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이라고 불렀고, 또한 그의 아들을‘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책봉하였으니, 분명 이에 상응하는 조직 체계를 갖추었을 것이다. 이후 무왕(武王)과 문왕(文王) 시기 초에는 강역이 확장되고 국가의 조직이 강화된 것을 제외하고 대체로 전례를 따라 운영되었을 것이다. 이는 문왕이 즉위한 다음 해인 738년 6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당례(唐禮)』 등을 구입하였고, 이러한 문물 수입을 통해 발해 관제를 조직하였다는 것도 문왕 대에 관제가 정비되었다는 설명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문왕 시기에는 지속적으로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서 5경(京)을 설치하고, 더 나아가 3성 6부로 대표되는 중앙 통치 기구를 확립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국가 체제를 갖추었으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발해의 중앙 정부 기구는 이른바 3성 6부 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이에 각 관청들을 배합하는 방법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서 3성이란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을 말하는 것이며, 6부란 정당성 관하의 충부, 인부, 의부, 지부, 예부, 신부 등 행정 6부를 말한다. 발해의 3성 6부는 말갈인을 다스리기 위한 통치 기구가 아니고, 고도의 농경 문화에 기반하고 있는 고구려 유민들을 다스리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