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료국

한자 興遼國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발해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029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030년
정의

11세기 초 발해 유민 대연림(大延琳)이 거란의 동경 요양부(東京遼陽府)에서 세운 나라.

변천

발해 유민들은 11세기 초 요동(遼東)을 중심으로 흥료국이라는 이름 아래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흥료국은 거란 제국의 황금기인 성종(聖宗) 9년(1029)에 동경 요양부(東京遼陽府)의 대장군 대연림에 의해 건국되었다.

1029년 8월에 동경 사리군 상온(東京舍利軍詳穩) 대연림은 거란의 동경 유수 부마도위 소효선(蕭孝先)과 남양공주(南陽公主)를 가두고 호부사 한소훈(韓紹勳), 호부부사 왕가(王嘉), 사첩군도지휘사 소파득(蕭頗得) 등을 살해한 다음 왕위에 올라 국호를 흥료(興遼), 연호를 천경(天慶)으로 삼았다.

『고려사』에 따르면 대연림은 발해 왕실의 후손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 측에서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마도 흥료국에서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사신들을 통해 알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연림이 대조영의 7대 후손이라면 흥료국은 비록 발해 멸망 후 103년이 지났다 하더라도 과거 발해 왕조의 부흥을 꾀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국호를 흥료라 한 것은 예로부터 중요하게 여기던 요동 지역을 다시 찾고 나라를 부흥시킨다는 생각에서 만들어졌던 것으로 여겨지며, 흥료국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발해 유민에 대한 거란의 가혹한 경제적 수탈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흥료국의 부흥 운동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1029년 8월부터 1030년 8월까지 만 1년 정도 지속되었다. 이는 요동 일대의 발해 유민 모두가 참여한 것이 아니고, 진압 과정에서 거란 측에 귀속한 하행미(夏行美)나 양상세(楊祥世) 같은 인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1030년 이후 갑자기 고려로 항복해 들어오는 발해 유민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흥료국의 부흥 운동 실패에 따른 것으로 거란의 이주 정책에 반대하여 고려로 넘어온 발해 유민도 상당히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흥료국의 부흥 운동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는 점이다. 구원 요청 문제는 흥료국 부흥 운동의 지지 기반이 어떠한 세력이었는가 하는 점과 깊이 관련이 있다. 흥료국의 지지 기반은 거란 지배하의 발해 유민, 한인, 해인, 여진인 등으로 전해진다.

물론 동경 요양부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주, 현의 발해 유민이 주체 세력이었다. 한인들의 경우는 대연림이 도움을 받기 위하여 노력하기도 했지만, 도리어 부흥 운동의 방해 세력으로 변하였다. 여진족은 다수가 참가했으나 활동 인물이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단순한 동조 세력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흥료국은 5회에 걸쳐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최초의 구원 요청은 거사 후 한 달 뒤인 현종 20년(1029) 9월에 동경장군 대연림이 대부승(大府丞) 고길득(高吉得)을 보내 건국을 알리고 아울러 구원을 요청하였다. 마지막 구원 요청은 현종 21년(1030) 9월의 일로서 흥료국의 영주 자사 이광록이 와서 급함을 알리더니 조금 후에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려에 머물러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 동북아역사재단 편,『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2007)
  • 이효형, 『발해 유민사 연구』(혜안, 2007)
  • 한규철, 『발해의 대외 관계사』(신서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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