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定安國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발해 |
정안국은 『송사(宋史)』에 ‘정안국전(定安國傳)’이 마련되어 있어 국명 등 일부 관련 사항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정안국은 본래 마한(馬韓)의 종족인데, 거란(契丹)에게 격파 당하자 그 추수(酋帥)[우두머리]가 남은 무리들을 규합하여 서쪽 변방에 웅거하고 나라를 세워 개원하면서 자칭 정안국이라 하였다고 한다.
정안국 왕은 처음에 열만화(烈萬華)였는데, 뒤에 오현명(烏玄明)으로 바뀌어 등장하고 있어 열씨에서 오씨로 정권이 교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991년 정안국 왕자의 이름이 태원(太元)[또는 大元]으로 나타나고 있어, 정권이 다시 바뀌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정안국의 왕 오현명이 송나라에 보낸 글에는 “신은 본래 고구려 옛 땅인 발해의 유민으로서, 한 구석에 웅거하여 세월을 보냈다.”라고 밝혀져 있어 발해 유민이 세운 부흥 국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고구려-발해-정안국이라는 계승 의식을 분명히 드러낸 것으로, 정안국이 발해 유민사는 물론 한국사의 흐름에서도 일정한 위상을 차지함을 보여준다.
또한 정안국은 '원흥(元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발해가 거의 전 기간에 걸쳐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던 점을 참고할 때, 발해 유민들이 세운 정안국은 발해의 전통을 따랐을 가능성이 있다. 정안국은 발해 유민이 세웠음을 국왕이 표명하였으므로, 유민들이 멸망 전 발해의 다양한 전통을 알고 있던 상황에서 새로운 부흥 국가를 세운 후 연호 사용의 전통 역시 계승하였던 것이다.
정안국의 중심지 역시 중요한 부분인데 연구자의 견해가 다양하다. 다만 고구려 옛 땅의 서비(西鄙)[서쪽]를 차지하였다는 점과 당시 정안국을 지나는 여진(女眞) 사신 편에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을 토대로 할 때 압록강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또한 정안국은 후발해 및 고려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는데, 대립보다는 친선 관계를 통한 공존을 모색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