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구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물품·도구/물품·도구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운반구
정의

동북3성 지역 한인들이 땔감 또는 사람을 나르는데 사용하는 운반구.

개설

발구는 두 개의 긴 나무를 나란히 얽어서 물건이나 땔감 또는 사람을 나르는 데에 쓰는 원시적인 운반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높이 쌓인 눈이 오랫동안 녹지 않는 북한의 산간 지대와 강원도 일대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발구에 대한 첫 기록은 1485년에 발간된 『경국대전』[평양본]에 등장한다. ‘발외’ 항목에서 ‘곡차(曲車) 곱쟝 술ㅣ 혹 동차(童車) 강(杠) 발외 오’라 새겼다. 이 내용을 통해 발구는 본디 ‘발외’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곱쟝 술ㅣ’는 ‘굽은 수레’라는 말로, 발구의 옆모습이 숟가락처럼 굽은 것을 이른다. 그리고 강(杠)은 중국 사람들이 긴 나무 양끝에 물건을 걸고 어깨로 메어 나르는 채를 가리킨다. 양쪽이 발구처럼 휘어진 까닭에 ‘발외 오’라 하였을 것이다.

1527년 최세진이 낸 『훈몽자회(訓蒙字會)』에도 발구가 들어있다. 최세진은 쟁기[犁]를 새기면서 ‘보 례 우칭(又稱) 보십 왈리두(曰犁頭) 우파리(又把犁) 발외 우박우(又駁牛) 우경지(又耕地)’라 적었다. 그가 하필 쟁기 새김에서 발구[把犁]를 들춘 까닭은 무엇일까?

‘파리(把犁)’는 단지 우리말 ‘발외’를 한자의 음을 빌어 적은 것인데, 최세진은 ‘리(犁)’만을 보고 쟁기의 한 가지로 잘못 보았기 때문이다. 중국 동북 지역에서는 오늘날의 발구를 ‘배력(扒力)’이라 쓰고 ‘바리-’로 읽는다. 또 흥안령 산맥 일대에서 거주하는 오로촌족들에게도 바리[爬犁]로 알려져 있다. 이는 발구가 이 지역에서 들어온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1690년에 나온 『역어유해(譯語類解)』의 저자는 ‘파리(把犁)’를 차량조(車輛條)에서 다루면서 “달구지를 닮았으며 바퀴는 없다(似車而無輪)”고 하여, 앞사람의 잘못을 바로 잡았다. 또 그는 옛 만주 지역에서 이것을 ‘바리’라 불렀다는 사실도 밝혔다. 1778년에 나온 『방언유석(方言類釋)』에도 비슷한 새김이 있다.

그러나 발구를 가장 그럴듯하게 설명한 책은 두만강 연안의 풍속을 적은 공양호[1724∼1802]의 『공주풍토기(孔州風土記)』이다. 그는 “작은 수레를 발고(跋高)라 한다. 바퀴가 없으며, 양쪽의 채는 활처럼 휘어서 뻗어 나갔다. 끝에 가로 턱을 세우고 짐을 싣는다. 가볍고 빠르며 더구나 눈 위에서는 돛배가 물 위로 미끄러지듯 빨리 달린다.”라고 하였다.

연원 및 변천

황해도와 인접한 백령도에서는 발구를 ‘발래’라 불렀다. 이것은 발구의 옛 이름인 ‘발외’에서 온 것으로 5백여 년 전의 그 명칭과 맥이 닿아 있다.

발구는 1920년대에 달구지가 퍼지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요령성 한인들은 여전히 겨울철 나무를 운반하는 데 발구를 이용하고, 거름을 운반할 때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일소를 훈련시킬 때 발구를 걸기도 한다. 이 지역 산에는 발구가 오랫동안 왕래하면서 생긴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기도 하다.

형태

한국의 발구에는 외발구와 쌍발구의 두 종류가 있다. 외발구는 홀몸으로 이루어진 발구로, 바닥의 한 끝은 마소의 멍에에 연결되고 다른 끝은 땅에 끌린다. 따라서 지면과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바닥을 평평하게 깎는다. 소가 발구를 끌 때에는 앞으로 번쩍 들리므로, 이것이 없으면 짐이 뒤쪽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이에 두 개의 바닥 끝 쪽에 낮은 기둥을 박고 이에 의지하여 가로대를 걸어 짐이 뒤로 떨어지는 것을 막는다. 이를 ‘도매’라고 한다. 가로대는 바닥 너비보다 조금 길게 한다.

외발구는 강원도 등지의 산간 지대에서 눈이 많이 쌓였을 때, 산에서 통나무와 섶나무를 나르는 데 쓴다. 길이가 긴 나무는 도매 위에 잡아매는 까닭에, 앞에서 설명한대로 나무의 한끝이 바닥에 끌려서 앞으로 쏠리는 힘을 덜어준다.

쌍발구는 앞채와 뒷채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발구로, 경우에 따라 앞채만을 쓰기도 한다. 예컨대 산에 나무를 하러 갈 때 기슭까지는 앞 뒤 두 채를 이어서 끌고 가고, 산으로 오를 때에는 앞채만 쓰는 것이다. 소의 피로도를 덜어주기 위해서이다.

앞채의 구조는 외발구와 같으며 뒷채 또한 앞채 그대로이다. 따라서 뒷채의 앞을 앞채의 도매에 잡아 매면 쌍발구가 되는 것이다. 뒷채는 자동차에 이어 붙이는 트레일러와 같아, 좁은 길에서 방향을 바꾸기에 쉽다.

이밖에 요령성의 한인들은 채를 길게 만들고 가로대를 앞 뒤 두 곳에 붙여서 쓰기도 한다. 이 위에 싸리로 엮은 큰 광주리를 걸쳐놓고 거름 따위를 나른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어린이들이 눈이나 얼음 위에서 지치며 노는 썰매도 ‘발구’라 불렀다. 따라서 발구와 썰매 사이의 연관이 있음이 분명하다. 썰매도 외발구와 쌍발구 두 종류가 있다. 외발구는 쇠 날이 달린 두 개의 바닥나무에 널쪽을 대어 만든 일반 썰매이다. 이밖에 넓은 쪽나무 바닥에 외날을 달고 발구채로 밀고 나가며 지치는 틀도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쌍발구는 외발구 앞에 쇠날을 단 쪽나무를 이어 붙인 것으로, 이에 다시 가로목을 얹어 발판으로 삼는다. 외발구를 탄 채로 방향을 바꿀 때에는 몸을 틀어야 하지만, 쌍발구는 앞발을 움직이는 데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므로 그만큼 편리하고 안정성도 높다.

참고문헌
  • 김광언, 『한국 농기구고(韓國 農器具攷)』,(한국 농촌 경제 연구원, 1986)
  • 김광언, 「제11장 농기구」(『중국 길림성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국립민속박물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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