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야 | 생활·민속/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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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 | 물품·도구/물품·도구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농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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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질 | 목재 |
| 용도 | 경지를 가는 도구 |
중국 연변 지역의 한인들이 논밭갈이와 김매기에 사용하는 연장.
길림성(吉林省) 지역에서는 토양, 재배 작물, 경작 방법에 따라 다양한 명칭의 쟁기를 사용하고 있다. 쟁기라고 직접 부르는 명칭 이외에도 논쟁기, 가대기, 후치, 연장, 호리, 겨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길림성(吉林省) 지역에서 다양한 쟁기가 사용되는 이유는 넓은 토지, 적은 일조량과 수분 등 자연 환경에 따른 결과가 쟁기의 발전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길림성은 이주 한인과 한족이 어울려 사는 곳으로, 두 민족 간 쟁기의 유사점·차이점 및 교류 내용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지역이다. 실제로 연변 지역의 한족들은 한인들과는 다른 쟁기를 쓰며, 한인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쟁기를 고집하고 있다. 이것은 민족의 전통적인 풍속, 습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길림성 통화(通化)의 한인들은 밭갈이에 한족의 쟁기를 빌려 썼고, 한족들도 논갈이에 한인들의 쟁기를 쓴다. 연변과 달리 통화 지역은 민족 간에 빈번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초 한국의 평안도(平安道)로부터 이주해 온 길림성(吉林省) 유림현(渝林縣) 영수(迎水) 마을 한인들은 선쟁기를 수전(水田)에서만 사용하기 때문에 ‘논쟁기’라고도 부르며, 수전 농사를 하는 한족(漢族)들도 한국식 쟁기를 사용한다. 한족들이 한국 전통 방식의 쟁기를 쓰는 이유는 자신들의 쟁기보다 심경(深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에의 길이가 250㎝ 정도로 길어 쟁기를 회전하는 데 불편하기 때문에 논 가장자리에 도착하기 전에 쟁기를 미리 돌린다. 심경을 조절하기 위한 특별한 장치가 없기 때문에 낮게 갈기 위해서는 손잡이를 위쪽으로 들어야만 한다. 그래서 손잡이는 술 중간에 설치하였다.
연변의 한인들은 쟁기를 수전(水田) 가대기라고 부르고, 한족들은 호리라 일컫는다. 수전 가대기가 후치나 가대기와 다른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보습 위에 볏이 달리고, 술에 바닥이 있으며 이곳에 긴 쇠를 연결해서 보습과 볏의 각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근래에는 한족들도 한인들이 사용하는 한국식 쟁기를 쓰고 있다. 한족의 쟁기는 볏이 달리지 않아 볏밥이 좌우 양쪽으로 흩어지므로 고랑이 생기지 않아, 사람이 오가며 일하기에 큰 불편이 따른다. 또 날이 깊이 들어가지 않아 풀이 뿌리째 뽑히지 않는다. 한국식 쟁기는 김을 매기도 쉽고 특히 비탈 밭의 경우 한국식 쟁기는 볏이 있어서 흙을 위쪽으로 떠올려 주며 손잡이도 좌우 양손으로 잡게 되어 안정감이 있다. 그 반면 한족의 것은 볏이 없고 손잡이도 하나뿐이다. 다만 저들의 쟁기에는 성에 끝에 작은 받침이 달려서 쟁기질을 하기는 쉽다. 그러나 땅을 깊이갈 수 없다는 결점이 있고 받침대가 땅에 닿게 하려고 성에를 몹시 굽힌 까닭에 힘이 분산되기도 한다.
이주 한인들은 농사를 짓는 농기구들에 대하여 중국 땅에서 백여 년을 살아오면서도 중국의 것을 받아 사용하기보다 본디 고국에서 사용한 연장에 더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논이나 밭을 가는 쟁기류는 오히려 중국인이 한인들에게 배워 쓰는 정도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농기구가 지닌 장점에서 비롯되기도 하였지만, 이 땅에 이주해온 사람들이 고향에서의 농사법과 농기구를 고집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이주민의 고향에 따라 농기구에 큰 차이가 나타나고 부분 명칭이 달라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한인들은 농기구를 중국 동북 지역의 환경에 맞추어 쓴 것이 아니라 농사법을 한국식 농기구에 알맞도록 바꾸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특히 장재 마을의 경우 한족은 한 사람도 살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집체 시절에 세웠던 합작사 대장간을 마을에서 공동 운영하여 쓰기 알맞은 농기구를 생산해 내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후치나 수레 등의 특정 부분의 경우 이곳에서만 쓰는 방식임을 강조하면서 한족들도 배워간다는 말을 거듭 늘어놓았다.
1960년대에 들어와 전기가 보급되면서 알곡 및 가루를 내는 연장이 급속하게 자취를 감춘 것이나 논밭 겸용의 쇠치가 등장해서 재래의 가는 연장이 사라져 가는 현상은 우리네와 닮은 점이다.
쟁기의 기본적인 구조는 술, 손잡이, 성에, 쟁기 받침, 한마루 등이다. 술은 성에와 쟁기 받침을 고정시키고 가장자리에는 손잡이가 부착되어 있다. 손잡이는 한인들의 경우 양손으로 잡을 수 있게 술 가장자리에 횡목을 대거나 술 한쪽에 비스듬히 나무를 박아 손잡이로 사용한다. 이와 반해 한족의 쟁기는 손잡이가 짧고 한손으로 잡는다. 성에는 가축이 견인하는 수에 따라 그 길이가 다른데 한 마리 소가 견인하는 경우에는 성에가 짧고, 두 마리인 경우에는 길다. 전자를 호리, 후자를 겨리라고 하는데 겨리의 경우 멍에는 긴 가로목이다. 겨리의 긴 성에는 한인[조선족]이나 한족 모두 곧은 나무이나 호리인 경우 한족의 것은 굽은 형태로 직선형인 한인들의 것과 차이를 보인다.
길림성의 한인들과 한족이 쓰는 두 갈래 성에, 쟁기는 형태상에서는 큰 차이점을 보이지 않지만, 각 부분의 장치에서 민족적 차이를 엿 볼 수 있다. 약간 휘어진 술에 두 갈래로 갈라진 Y자 모양의 성에를 끼운 것은 공통점이지만, 한인들은 술과 성에 사이에 한마루를 설치하였고, 술과 성에가 벌어지지 않도록 한마루와 손잡이 사이에 탕게를 틀었다. 또한 두 갈래로 된 성에 감으로 반드시 제가지를 사용한다. 이에 반해 한족들은 자신들의 습관대로 탕게를 틀지 않고 제가지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쟁기 받침[犁床]은 유무와 길이에 따라 무상리(無床犁)와 유상리(有床犁), 단상리(短床犁)와 장상리(長床犁)로 구분한다. 이처럼 다양한 쟁기 받침이 등장하는 것은 지역·습관·지형·토양 등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북방과 우리나라에서는 땅이 경사지고 굴곡이 있고, 단단하면서 돌이 많은 산지에서는 무상리를 많이 사용하고, 평지이고 흙이 부드러운 곳에서는 장상리를, 호리인 경우 단상리를 많이 쓰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습에 따라 다른 유형의 쟁기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무상리를 쓰는 길림성 통화 지역과 달리 화룡(和龍) 장재촌(長財村) 농민들은 장상리를 사용하는데, 그들은 무상리를 쓰면 보습이 땅에 박혀 도저히 소가 끌 수 없다고 하면서 장상리를 고집한다. 통화 지역의 설명은 장재촌과 반대이다.
한마루는 성에와 술이 벌어지는 것을 막아주고, 심경을 조절하는 장치로 이용된다. 그런데 한마루는 한인들의 쟁기에서만 보이는 한국식 쟁기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밖에 쟁기의 부속품으로 보습과 볏이 있다.
쟁기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은 성년으로서 대접을 받았고, 쟁기 기술은 후대에 전승되는 중요한 생산 기술이자 유산이다. 그밖에도 쟁기는 세상을 풍자하고, 근면한 생활을 권고할 때 빗대어 이야기하는 대상이었다.
길림성 집안현 영수(迎水) 마을의 촌장 김창률(金昌律)에 따르면, 논쟁기는 천 평 정도의 논을 가는 데 반나절이면 족하고, 보습은 5~6년에 한번씩 교환해주며, 가격은 20 위안 정도 든다고 한다. 선쟁기는 가볍고 구조가 간단하기 때문에 누구나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쟁기 바닥이 없는 관계로 안정감이 없어 이 쟁기를 부릴 때는 많은 기술을 요구한다.
쟁기로 논을 가는 방법에는 밖에서 안으로 둥글게 먹어 들어가는 것과 곧바르게 한 번 갔다가 되짚어 오는 것 등 두 가지가 있으나 장재 마을에서는 논뿐만 아니라 밭에서도 일직선으로 오가며 갈아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