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墓祭 |
|---|---|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 유형 | 의례/제 |
| 지역 | 길림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의례 |
|---|
길림성, 요령성 지역에서 한인이 조상의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
한인이 조상의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로 묘사(墓祀), 묘전 제사(墓前祭祀)라고도 한다.
전통적으로 묘제의 연원은 『주자가례(朱子家禮)』가 한국 사회에 정착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의 기록 중 ‘속절에 산소를 오르는 것이 옛 습속을 따른다’고 하여, 속절에 묘를 찾는 습속이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재(李縡)는 『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 예로부터 정초, 한식, 단오, 추석에 묘제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자가례』가 정착되면서 고유의 묘제와 가례의 원칙이 점차 융화되어 갔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주자가례』에서는 전반적으로 사당에서 모시는 제사가 강조되고 있지만 가묘(家廟)를 두지 않는 일반 민중에게는 추석날 지내는 묘제(墓祭)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근대 시기 역사적 요인으로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하여 중국 동북 3성에 정착하기 시작한 한인에게 묘에서 지내는 제사는 중요한 의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문중에서 지내는 묘제로 4대 이상의 조상을 대상으로 하는 시제(時祭)와 중국 한인의 묘제는 기제사 대상과 거의 일치한다. 그 이유는 중국에 정착한 역사가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중이 형성될 수 있을 정도의 선대 조상이 없으며, 중국 해방 이후 공산 사회주의 정책으로 인해 족보 제작을 비롯한 전통적 문중 활동을 봉건 관습으로 규정하고 제약한 국가 정책의 작용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 한인의 묘제를 살펴보았을 때, 한국 남부 지역 문중에서 지내는 묘제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나 참여 인원 면에서 상당히 축소되어 있다.
길림성(吉林省) 한인에 의하면, 중국 한인에게 묘제는 주로 청명절, 중추절에 성묘를 하고 지내는 제사라고 할 수 있다. 추석에 묘제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 중양절에 지내기도 한다. 요령성에서는 청명절과 음력 10월에 묘소를 찾아 제사를 모신다고 하고 추석 때는 가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묘제는 상례의 절차로 소상 및 대상을 치를 때 진행하는 묘에서 지내는 제사, 기제사 봉사 조상에게 묘에서 명절에 지내는 제사, 사대조 이상 조상에게 시제로 지내는 제사로 제사를 받는 대상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상례시 소상과 대상을 치를 때 묘제는 진찬, 초헌, 고축, 아헌, 종헌, 우식, 고별 등의 절차로 진행된다. 절차의 방식은 집안에서 지내는 제사와 유사하다. 다만 고별은 우식이 끝난 후 상주와 복인들이 무덤 앞에 가지런히 일렬로 서서 함께 절을 하는 의식이다. 상례시 이루어지는 묘제는 상복을 입고 진행되고, 묘제를 마친 후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풍습이 있다.
중국길림성에서 명절에 지내는 묘제는 먼저 후토제부터 시작한다. 묘지 주변 외진 곳에 간단히 음식을 차린 후 술 한 잔을 따르고 두 번 절 한 후 술을 주위에 뿌린다. 원래는 후토제를 지낼 때 현장에서 세 번 기름을 태워 냄새를 피우고 술도 세 번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1990년대 산불 위험성 때문에 기름에 볶은 떡을 올리고 술도 한 잔에 세 번에 걸쳐서 채우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길림성묘제는 집에서 지내는 제사와 대동소이하다. 다만 제사를 모시는 시간이 집에서는 밤에 지내지만, 묘제는 대개 정오 이전인 낮에 지낸다. 참석자는 남녀 구분 없이 술을 올리고, 삼헌의 구분 없이 일동 재배를 드린다. 축문을 쓰는 집안이 드물고, 제를 마치고 나면 음복을 하는 풍습이 있다.
상을 치르고 조상의 묘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 일반적으로 묘제를 지내는 사례가 많다. 그러나 최근에 화장이 늘어나는 추세에 따라 묘제를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경우가 늘고 있고, 또한 과거에 무덤이 있던 산은 상황에 따라 한족 마을의 공동 토지가 된 경우도 있어서 더 이상 무덤을 조성할 수 없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1990년대 이래 묘제는 많이 줄어든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