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圖們市 |
|---|---|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 지역 |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
| 시대 | 현대/현대 |
| 개설 시기/일시 | 1965년 |
|---|---|
| 변천 시기/일시 | 1933년 |
| 변천 시기/일시 | 1946년 |
| 변천 시기/일시 | 1949년 |
| 변천 시기/일시 | 1956년 |
| 변천 시기/일시 | 1958년 4월 |
| 변천 시기/일시 | 1958년 9월 |
| 변천 시기/일시 | 1968년 |
| 변천 시기/일시 | 1980년 |
| 성격 | 행정 구역 |
| 면적 | 1,164㎢ |
| 인구[남/여] | 140,000명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속하는 현급(縣級) 행정 구역.
1677년(강희 16년) 청 왕조는 조상의 발상지를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백두산과 두만강, 압록강 이북의 천여 리 지역을 봉금구역(封禁区)으로 정하고 황실의 독점 진주채집장, 인삼채집장 및 수렵장인 ‘금산위장(禁山圍場)’을 설치하였다. 당시 압록강, 두만강 연안의 조선농민들은 강을 건너가 도둑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침에 건너가 저녁에 돌아오는 형식(朝耕暮歸)을 하다가 점차 춘래추거(春来秋去) 혹은 영구 정착하여 장기 경작을 하게 되었다. 1714년(강희 53년) 훈춘협령(珲春協领)에 예속되었고 원래 이름은 회막동(灰幕洞)이었다. 1933년 돈도(敦圖)철도 개통 후 인가가 거의 없는 ‘애호전자(艾蒿甸子)’에 사람들이 모여 들어 도시가 되었다. 그해 6월 애호전자를 도문으로 개칭하고 연길현에 예속시켰다. 그리고 이름을 도문강이라고 하였다. 도문의 동음이역으로 토문(土們) 또는 두만(豆滿)이라고 적기도 하였다. 도문은 만주어로 “강이 많고 만수의 근원(河流衆多 萬水之源)”이라는 뜻이다. 도문이라는 지명은 두만강에서 비롯되었다.
1933년 도시가 형성되어 도문진으로 개칭되었다. 1946년 3월에는 연길현 도문시정부가 설립되어 중산(中山)을 비롯하여 중앙(中央)·중화(中華)·신민(新民)·광영(光榮)·장안(長安)·화평(和平)·철로(鐵路)·시장(市場) 등 9개 향을 두었다. 1949년 9월에는 도문시정부를 도문시인민정부로 개칭하였다. 1950년 9월에는 도문시에 중산(中山)을 비롯하여 건화(建華)·신화(新華)·중앙(中央) 등 10개 가와 3개 행정 마을을 두었다. 1956년 연길현 인민위원회에서 도문시를 도문진으로 변경하였다. 1958년 4월에는 연길현 인민위원회에서 도문진을 도문진과 농안향으로 나누었다. 9월에는 도문진공사를 설립하여 5개 관리구을 두었다. 1961년 관리구를 생산대대로 변경하였다. 1965년 3월 왕청현의 석현진과 합병하여 현급인 도문시(圖們市)가 되었고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예속되었다. 1968년에는 도문시혁명위원회로, 1980년 7월 23일 도문시인민정부로 개명하였다.
도문시에는 월청진(月晴鎭), 석현진(石峴鎭), 장안진(長安鎭), 양수진(凉水鎭)과 신화가도, 월궁가도, 향상가도 등 60여 개의 행정 마을이 속해 있다. 도문시 전체 인구의 약 59%는 조선족으로 제지, 석유화학, 방직, 목재 가공 등의 공업이 발달되어 있다. 동, 사금, 대리석, 화강암, 석회석 등의 광물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그리고 두만강과 포어허퉁하, 가야하 등의 하천이 흐르기 때문에 담수자원도 풍부하다. 관련 기관 및 단체로는 도문시 문화관, 도문시 가무단, 조선족 비물질문화유산전람관 등이 있으며, 매년 중국조선족두만강관광축제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