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麻線溝 1號 古墳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유적/고분 |
| 지역 | 길림성 집안시 |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 성격 | 고분 |
|---|---|
| 양식 | 흙무지 돌방 벽화 무덤(봉토 석실 벽화분) |
| 크기(높이 | 높이 5m |
| 지름) | 한 변의 길이 13m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1년 여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2년 가을∼1963년 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3년 8월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72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7년 |
| 소재지 | 집안시 서쪽, 마선향 마선촌 |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통구 고분군(通溝古墳群) 산하 마선구 고분군(麻線溝古墳群)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
마선구 1호 고분은 흙무지 돌방 벽화 무덤[봉토 석실 벽화묘]이다. 고분의 외형은 방형에서 봉토를 쌓아 올라가는 형식의 방대형이다. 그러나 봉토의 유실이 심해 동벽과 북벽의 돌이 노출된 상태이다. 고분의 규모는 한 변의 길이가 13m, 높이가 5m이다[『고구려 고묘 벽화 연구』]. 고분의 내부는 양쪽에 곁방이 달린 널길,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 구조이며 방향은 북서향이다.
널길의 크기는 길이 4.65m, 너비 1.22m, 높이 1.6m이다. 서쪽 곁방은 길이 1.3m, 너비 0.9m, 높이 2.15m의 규모에 변형 궁륭식[穹窿式, 아치형] 천정을 가지고 있다. 북쪽 곁방은 길이 1.25m, 너비 0.95m, 높이 2.08m이며, 삼각 고임식 천정 구조로 되어 있다. 널방은 거의 정방형으로 남벽과 북벽이 각각 4.28m, 동벽의 길이는 4.15m, 서벽은 길이가 4.23m이다.
널방의 높이는 4.05m이며 천정은 궁륭식으로 축조되었다. 널방 입구에 두 개의 돌문을 달았고 한가운데에는 천정을 받치는 원형 돌기둥을 세웠다. 돌기둥의 직경은 0.62m이고 기둥에는 백회를 발랐다. 널방의 바닥에는 두 개의 돌관대를 설치하였다. 고분의 조사 과정에서는 귀달린 금잔, 금제 그릇, 금동 마구 장식, 골제 장식, 철제 못과 그릇 등 상당한 양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고분의 벽에는 백회를 바르고 벽화를 그렸으며 벽화의 주제는 생활 풍속이다.
벽화는 널길과 양쪽 곁방, 기둥, 관대, 널방 벽면에 고루 그려져 있다. 양쪽의 곁방은 그 규모가 제법 크고 벽화가 그려져 있어 마선구 1호 고분은 세 방[삼실] 구조로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벽화는 주황색 선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였으며 묵선으로 윤곽을 마무리하였다. 벽화의 손상이 심해 현재는 벽화의 내용이 분명하지 않다.
널길의 천정 가운데에는 직경 96㎜의 연꽃을 그렸다. 돌기둥의 옆면 역시 연꽃으로 장식하였으며 관대에는 호피무늬를 그렸다. 양 곁방과 널방의 벽과 천장 고임에는 기둥과 두공(枓拱) 등을 그려 넣어 고분 내부가 목조 가옥처럼 느껴지게 하였다. 남쪽 곁방에는 외양간, 고깃간, 높은 창고와 베틀 등이 그려져 있다.
북쪽 곁방에는 기와지붕을 가진 집 두 채를 나란히 그렸는데 남쪽 건물 안의 가로대에 새들이 앉아있다. 또한 기사가 사슴을 사냥하는 장면도 그려져 있다. 두 곁방 모두 천정은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널방의 남벽에는 기와집, 무용수가 그려져 있으며 동벽에는 매 사냥꾼, 시종, 묘주 부부 등이 묘사되어 있다. 북벽에서는 개마 무사를 볼 수 있지만, 서벽의 벽화는 남아 있지 않다. 널방의 천정 역시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마선구 1호 고분에서는 금기 3점, 금동 마구 장식 22점, 골제 장식 2점, 철제 37점, 사이 시유 도기호 2점, 시유 도기 부뚜막 모형 1점, 시유 도기 대접 1점 등 약 7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일찍이 도굴을 당하여서 유물이 원래의 자리에 있지 않은 상태였다. 시유 토기 중에는 깨진 잔편이 널길, 널방 등에 흩어져 있기도 하였다. 금동기는 비교적 얇고 녹이 슬었다. 대부분이 부속품이거나 장식품이며, 일부는 마구의 한 부분이다. 출토된 토기는 진흙으로 만든 홍색의 토기이며, 거기에 녹색 유약을 발랐다.
출토 유물을 보면 금제 장식, 금동 공예 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약을 입힌 도기[시유 도기]의 경우도 고운 태토로 단단하게 만들고 거기에 유약을 발라 선명한 색을 보여주고 있어 당시의 제작 기술을 보여준다. 또한 철기의 다량 출토는 당시 고구려에서 철기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지금까지 집안 지역에서 시유 도기는 무덤에서만 출토되었고, 마선구 1호 고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유 도기는 순장용 도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선구 1호 고분은 마선구 고분군에 있는 유일한 벽화 고분이며, 널방의 원형 기둥 또한 고구려고분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예이다. 고분 내부에 기둥을 세운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널방의 중앙에 세운 것은 없어 마선구 고분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넉넉한 크기의 널방, 화려한 벽화, 다량의 유물, 벽화에 보이는 시종들과 여러 채의 집, 가무도 등은 피장자가 상당한 부와 권세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선구 1호 고분의 편년에 대해서는 4세기 중엽부터 5세기 말까지 다양한 설이 있지만 5세기를 넘지는 않는다. 최초의 보고서를 낸 방기동은 고분의 천정 구조가 각저총(角抵塚)이나 무용총(舞踊塚)보다는 발전된 형태이며, 따라서 이들 고분보다는 나중에 조영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또한 통구 12호 고분, 삼실총(三室塚) 등과 여러 가지 공통점이 보이고 있는 바, 마선구 고분의 조영 시기 역시 이들과 비슷한 5세기일 것이라 하였다. 편년의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벽화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생활 풍속계 벽화가 주류를 이루고 연꽃무늬 장식이 배치된 것으로 보아 5세기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