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하 3319호 고분

한자 禹山下 3319號 古墳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고분
양식 계단식 돌무지 벽돌방무덤
크기(높이 한 변의 길이 약 21m, 높이 2.65m, 방향은 남서쪽 75°.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1년 10월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2년 4월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6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79년 10월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3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4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7년 5월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3년
보수|복원 시기/일시 2003년
소재지 집안시 태왕진 우산촌N : 41° 07′ 55.2″E : 126° 10′ 43.4″
정의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통구 고분군(通溝古墳群)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벽화 고분.

개설

우산하 3319호 고분통구 고분군의 6개 권역 중 하나인 우산하 고분군(禹山下古墳群) 내에 있는 무덤이다. 계단식 돌무지 벽돌방 무덤이며, 벽화의 흔적도 발견된다.

위치

우산하 3319호 고분국내성(國內城)에서 북쪽으로 약 1㎞ 떨어진 산중턱에 위치하여, 무덤 정상에서 집안시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우산(禹山)의 남·북·서 3면은 강으로 둘러싸여, 비교적 개활한 하곡이 형성되어 있다. 우산의 남쪽 구릉은 길이가 4㎞, 너비가 1m의 완만한 구릉지대로 3,000여 기의 고구려고분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 지역이 바로 우산하 고분군이다. 우산하 3319호 고분은 우산 서단의 산언덕에 위치해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우산하 3319호 고분은 1961년 10월에 지표 조사가 이루어진 이래, 1962년 4월과 1966년에 각각 실측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1979년, 1983년, 1984년의 조사를 통해 묘 측면에서 연대를 비롯한 명문들이 기재된 와당이 발견되었으며, 1997년 5월에 길림성 문물 고고 연구소와 집안시 박물관이 조사·측량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66점의 유물과 일부 건축 부재 등을 수습하였고, 고분 내부를 조사하면서 벽화 고분이라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가장 최근에는 2003년에 장복유(張福有) 등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이 소장하고 있었던 명문 와당 반쪽을 발견하였는데, 이전에 발견된 명문 와당편의 명문들과 같은 내용으로 보고, 여러 명문들을 조합하여 '태세재정사오월입일 위중랑급부인조개묘와 우작민사천체암화 우용영시 흥예득향만세(太歲在丁巳五月廿日爲中郞及夫人造蓋墓瓦又作民四千餟盦禾又用盈時興詣得享萬世)'로 판독하기도 하였다.

형태

우산하 3319호 고분은 계단식 돌무지 벽돌방 무덤이다. 평면은 방형이며, 내부·외부 두 부분으로 축조되었는데, 내부에는 벽돌로 무덤칸을 쌓았고, 외부는 돌로 계단을 구축하였으며, 중간은 깬돌로 채워져 있다. 무덤의 내부 구조는 무덤길, 널길, 이실, 무덤칸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무덤에 많은 암키와와 수키와가 흩어져 있는데, 이를 통해 고분 위쪽에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출토 유물 및 관련 유적

우산하 3319호 고분의 동남쪽 모서리에서 9m 떨어진 지점에 길이 1.04m, 너비 0.54m, 두께 0.9m이고, 아래가 위보다 넓은 청회색 침적암이 있는데, 그 석면에는 단도(單刀)를 이용해서 새긴 인상(人像)이 있다. 인상의 몸은 반라이고, 머리에는 책관(幘冠)을 쓰고 있는데, 책관의 꼭대기 부분에는 조우(鳥羽)가 장식되어 있다. 갸름한 복숭아 모양의 얼굴에 턱은 뾰족하며, 단순한 호선으로 어깨, 팔, 가슴, 가느다란 몸을 새겨 놓았다.

우산하 3319호 고분은 일찍이 도굴과 파괴로 인해 출토 유물이 모두 원래 위치에서 이탈한 채 무덤칸·이실·무덤 위의 붉은 흙에 흩어져 있었다. 총 66점의 기물, 그리고 건축 부재 및 잔편들이 출토되었다. 금동기는 장식구인 보요(步搖)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금동제 십판매화형 보요 장식, 금동제 원형 보요 장식, 금동제 행엽형 보요 엽편, 금동제 원형 보요 엽편, 금동제 갑편, 금동제 사미(鉈尾), 금동제 못, 금동제 누공매화추(鏤空梅花墜) 장식, 금동제 관장식 등이 주로 이실 안에서 발견되었다. 또 철제는 칼·재갈·갑편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반구호, 유약을 바른 도기 항아리, 새머리 모양의 항아리, 호자(虎子), 향로, 대접, 발(鉢), 대야가 수습되었다. 고분의 위아래로 많은 벽돌을 비롯해 니질의 회색 수키와·암키와와 구름 무늬 와당[권운문와당(卷雲紋瓦當)]도 수습되었다.

묘실의 네 벽에 백회가 발라져 있으나, 대부분 박락되었다. 박락된 백회잔편에서 주홍색, 녹색, 흑색 등을 볼 수 있는데, 벽화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묘실의 동북모서리에는 홍색과 녹색으로 채색된 벽화면이 세 곳 남아 있다. 벽화면의 위치와 색깔로 볼 때 묘실 네 모서리에는 홍색 기둥, 그 중간에는 녹색의 장식 도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우산하 3319호 고분은 조사 이전에 이미 도굴 및 자연 파괴 등을 입었다. 무덤 위에는 나무와 잡초가 가득하였고, 계단석은 붕괴되어 원래 자리를 이탈한 상태였다. 무덤 정상의 가운데 부분에는 커다랗게 함몰된 구덩이가 있었다.

의의와 평가

우산하 3319호분은 외형은 돌무지무덤이지만 내부는 전축(塼築) 구조이며, 벽돌방[전실(塼室)] 내부 벽면에서 벽화의 흔적도 발견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여기서 출토된 와당의 명문에 의하면 정사년(丁巳年) 5월 20일에 묘가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357년으로 비정하여 고국원왕릉(故國原王陵)으로 보기도 하며, 함께 출토된 동진(東晋)계 청자와 보요 등을 357년 이후의 유물로 보아 소수림왕릉(小獸林王陵)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와당의 명문 내용 중 정사년에 중랑(中郞)과 그 부인을 위해 무덤을 덮는 기와를 만들었다는 대목이 주목된다. 또한 무덤 내부를 중국식인 벽돌로 축조한 점, 그리고 중국계 유물이 부장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이 고분은 동진(東晋)에서 활동하다가 고구려에 망명해 온 한인(漢人)과 그의 부인이 묻힌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참고문헌
  • 吉林省博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吉林省文物志编委会, 1984)
  • 魏存成, 신용민 역, 『高句麗考古』(삼성문화재단, 1996)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洞構古墓群禹山墓區JYM3319號墓發掘報告』,(『東北史地』2005-6, 2005)
  • 張福有, 「集安禹山3319號墓卷雲紋瓦當銘文識讀與考證」(『中國歷史文物』, 中國國家博物館, 2005)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香港亞洲出版社, 2007)
  • 張福有, 『集安禹山3319號墓卷雲紋瓦當銘文識讀與硏究』,(香港亞洲出版社, 2007)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吉林集安高句麗墓葬報告集』,(科學出版社, 2009)
  • 전호태, 「고구려 집안권 벽화고분의 현황과 과제」(『울산사학』14, 2009)
  • 정호섭, 「高句麗 壁畵古墳의 銘文과 被葬者에 관한 諸問題」(『高句麗渤海硏究』 36, 2010)
  • 여호규·강현숙·백종오·김종은·이경미·정동민,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유물Ⅴ(통구분지2),(동북아역사재단,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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