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三室塚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유적/고분 |
| 지역 |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우산촌 |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 성격 | 벽화 고분 |
|---|---|
| 양식 | 세 방 흙무지 돌방 벽화 무덤 |
| 크기(높이 | 지름이 약 20m인 원형 봉토, 연도 입구로부터 제1실 안 맞은편 벽까지의 길이는 약 7m, 제1실의 남쪽 벽에서 제2실 북쪽 벽까지는 약 6m, 제2실과 제3실의 길이는 약 6.5m |
| 조성 시기/일시 | 고구려 중기(5~6세기)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01~1910년, 1913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35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36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75년 |
| 보수|복원 시기/일시 | 1972년 |
| 보수|복원 시기/일시 | 1975년 |
| 소재지 | 중국 길림성 집안시 우산하고분군 |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통구 고분군(通溝古墳群) 산하 우산하 고분군(禹山下古墳群)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흙무지 돌방 벽화무덤.
삼실총은 널길과 이음길로 세 개의 널방이 ‘ㄷ’자형으로 이어진 특이한 무덤칸 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삼실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흙무지 돌방 벽화무덤[봉토 석실벽화묘(封土石室壁畫墓)]으로 생활풍속도와 사신도가 그려진 무덤이다. 세 개의 널방 벽에는 주인 부부 출행도, 사냥도, 공성도, 문지기, 네 채의 기와집, 무덤 주인공인 남자 1명과 여자 2명이 각각 한 집에 한 명씩 앉아 있는 모습, 장검을 든 갑주입은 무사와 우주역사 등이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남녀 연꽃 화생도와 각종 상서동물, 소머리 사람 몸의 신인(神人), 여러 종류의 비천(飛天)과 주악천(奏樂天), 쌍으로 그려진 사신도(四神圖) 등이 그려져 있다. 무덤의 구조와 벽화의 내용으로 보아 5세기 중엽 늦은 시기에 조성된 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실총은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太王鎭) 과수촌(果樹村)[옛 지명: 집안현 태왕향 우산촌(禹山村)]에 있다. 무덤은 통구 평야의 중앙부로 뻗어 나온 우산의 남쪽 기슭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무덤의 북쪽 20m 지점에 통화-집안간 도로와 철로가 지나간다. 무덤의 남쪽 250m 지점에 오회분(五恢墳)이 있으며 통구사신총(通溝四神塚), 각저총(角觝塚), 무용총(舞踊塚) 등의 잘 알려진 벽화고분들이 근처에 위치해 있다.
삼실총은 1913년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일행이 무덤 안에 벽화가 있음을 확인했고, 1935년 9월과 1936년 9월 두 차례에 걸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와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일행이 무덤의 구조를 실측하고 벽화 내용을 조사하였다. 이 조사단은 삼실총 제1 묘실의 정상으로부터 천정 돌을 열어 제치고 사다리를 놓고 들어가 간단한 기록을 했을 뿐 과학적인 발굴, 조사를 하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통구(通溝)』하권(下卷)에 기록된 삼실총 관련 내용에는 오류가 많다.
1972년 흙무지를 돋우고 무덤문을 새로 손보는 등 무덤 수리를 했고, 1975년 5월 집안현 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에서 벽화를 재조사하고, 한층 더 강력하게 화학적 보존 처리를 했다. 이때 제1 널방 바닥에 남아 있는 진흙을 제거했는데, 이 과정에서 흩어진 유골과 부장품들을 발견했다. 1997년 재조사와 실측 보고 작업을 하면서 측정했는데 무덤 무지의 둘레는 30m, 높이는 5m였다. 2004년 5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삼실총 무덤칸 지면의 백회층 아랫면은 강자갈층이며 강자갈 아래는 항토(夯土)층, 항토층 아래는 생토이다. 삼실총을 조영할 때 먼저 항토하여 지반을 굳건하게 한 다음 항토 지반 위에 강자갈을 깔아 묘실에 습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유적이 산기슭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형태의 구조로 되어 있다.
삼실총의 봉토는 평면이 원형이고, 평면 배치는 역 ‘ㄷ’자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세 개의 단실분이 무덤 안길[용도(甬道)]로 이어진 변형 단실분에 속하며 제1실을 기준으로 한 무덤칸[묘실(墓室)]의 방향은 남으로 기운 서향이다. 제1실은 너비 2.7m, 길이 2.9m, 높이 3.1m, 제2실은 너비 2.1m, 길이 2.8m, 높이 3.1m, 제3실은 너비 2.0m, 길이 2.5m, 높이 3.3m이다.
무덤칸은 일정한 크기로 다듬은 장방형의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3개의 무덤칸이 동시에 축조되어 하나의 통일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각 무덤칸의 천장 구조는 평행 삼각 고임으로 제1실은 5단의 평행 고임 위에 2단의 삼각 고임을, 제2실은 4단의 평행 고임 위에 2단의 삼각 고임을, 제3실은 5단의 평행 고임 위에 3단의 삼각 고임을 얹었다.
제1실에서는 상당수의 유골과 사발 5점, 손잡이 달린 잔 1점, 손잡이 4개 달린 호 1점, 화로 1점, 부뚜막 등이 출토되었다.
삼실총에는 무덤칸의 벽과 천장 면에 백회를 입히고 그 위에 생활 풍속도와 사신도, 권운문 도안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 놓았다. 다만 무덤 안길의 양 벽과 천정에는 벽화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무덤칸 제1실의 네 벽에는 생활풍속도를 그렸다. 평행고임으로 된 천정에는 사신과 권운문을 그려 하늘을 상징했다. 무덤칸의 네 귀퉁이에는 주홍색의 두공(枓栱)을 그렸고, 네 벽의 상단에는 붉은색과 황색의 장막을 그렸다. 남벽의 막에는 술이 달려 있고 영락(瓔珞)도 매달려 있다. 전체 무덤칸을 가옥처럼 꾸몄다.
동벽은 제1실의 주벽(主壁)으로 남녀 묘주가 집안에서 대좌(對坐)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전체 벽에는 모두 네 채의 집이 그려져 있다. 이 집들은 크기가 서로 같고 알맞게 배치되어 있다. 남쪽에서부터 보면 첫 번째 기와집 안에는 황색 관을 쓴 여인이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북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집 바깥에는 시종이 한 명 서 있다. 두 번째 기와집은 이층집이다. 아래층에 여인 한 명이 북쪽으로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집에 각각 앉아 있는 두 여인은 묘주의 처와 첩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 기와집에는 새 깃을 꽂은 검은 관(烏冠)을 쓴 남자가 남쪽을 향해 앉아 있다. 남자는 붉은 입술에 콧수염이 짧으며, 황색 저고리와 겉옷을 걸치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있다. 하반신은 그림이 떨어져 나가 알아볼 수가 없다. 네 번째 기와집은 이층집인데 용마루 끝에 치미(鴟尾)가 그려져 있다. 아래층에 두 사람의 시종이 묘주를 향해 나란히 서 있다.
남벽은 상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위쪽에는 무덤 주인 부부의 출행도(出行圖), 아래쪽에는 사냥도를 그려 놓았다. 출행도에는 11명이 왼쪽 방향으로 일렬로 줄을 지어 나아가는 모습을 그렸는데, 신분에 따라 크기를 달리 그렸다. 인물들의 옷은 모두 맞섶이고 고구려 특유의 점무늬 바지 혹은 점무늬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다. 사냥 그림에는 말을 타고 달리는 두 사람과 꿩을 쫓는 매가 그려져 있다.
서남벽 널방 입구 좌우 벽에는 실물 크기의 문지기 두 사람을 그렸다. 동남쪽 문지기는 짧은 수염에 눈이 큰 문관 풍의 인물이고, 서북쪽 문지기는 검보라빛 얼굴에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무인 풍의 인물이다.
북벽에는 공성도(攻城圖)가 그려져 있다. 벽의 서남쪽에는 성곽, 동북쪽에는 전투하는 그림이 있다. 성벽 바깥의 오른쪽 상단에는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뒹굴면서 격투를 벌이고 있고, 성 안에는 한 사람이 담장에 기대어 겁에 질린 듯 싸우는 사람들을 내다보고 있다. 또 성벽 바깥의 벌판에서는 마갑(馬甲)으로 무장한 말을 탄 두 명의 갑주 무사가 긴 창을 휘두르며 서로 쫓고 쫓기고 있다. 쫓기는 무사가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며 말을 달리고, 그를 쫓는 무사가 말 위에서 긴 창을 두 손 높이 쳐들고 곧 내려 찌르려 하는 모습을 박진감 넘치고 실감 나게 그려 놓았다.
천장고임에 그려진 벽화는 평행고임 제1단과 2단 4단의 일부 면에만 남아 있다. 평행고임 제1단에는 꼬인 구름무늬가. 제2단의 앞면에는 마주보는 두 마리의 주작과 두 그루의 나무, 안쪽 면에 한 쌍의 현무가 그려져 있다. 평행고임 4단에는 봉황새가 한 마리 그려져 있다.
제2 널방으로 이어지는 이음길 좌우 벽에는 문지기 장수를 한 사람씩 그렸다. 제2 널방 네 벽에는 역사와 장수를 그렸고, 천장부 평행고임 제1단에는 쌍사신을 그렸다. 동남면의 마주보는 두 주작 사이에 연꽃화생을 그렸다. 두 현무는 서로를 한번 감은 후 각기 마주 보도록 그렸다. 천장부에는 이외에 연꽃, 천마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상서로운 동물들, 꼬인 구름무늬, 남녀 연꽃 화생도, 소머리에 사람 몸을 한 신인, 여러 종류의 비천과 주악천 등을 그렸고 천정석에는 해와 달, 북두 5성, 남두 6성을 그렸다.
제3 널방으로 이어지는 이음길의 좌우 벽에도 문지기 장수를 한 사람씩 그렸는데, 제2 널방 세 벽의 역사와 얼굴, 자세, 옷차림새 등이 같다. 제3 널방의 평행고임에도 쌍사신도, 꼬인 구름무늬. 상서로운 새들과 구름, 봉황, 연꽃 등을 그려 놓았다. 천정석에는 해와 달, 그리고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삼실총은 삼국 시대의 고분 중 유일한 세 칸 무덤이다. 무덤칸의 결구와 벽화 내용은 고구려 건축사, 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벽화는 그 제재가 광범위하고 내용이 풍부하여 고구려 당시의 사회상과 우주관,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 군사활동과 무기체계, 성과 주택의 구조 등 다양한 부문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이 고분벽화에는 생활풍속도와 쌍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평행삼각고임의 천장구조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이것은 고구려의 벽화 내용과 고분구조의 변화 및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큰 의미를 갖고 있다. 회화 기교가 뛰어난 벽화가 그려져 있는 삼실총은 고구려 건축, 회화 예술과 고구려 벽화 및 편년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벽화의 내용과 무덤 천장의 구조, 출토유물 등으로 보아 삼실총의 축조 및 벽화 제작은 5세기 중엽 늦은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