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하 1041호 고분

한자 禹山下 1041號 古墳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우산촌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고분
양식 방단 계제 석실 벽화 무덤
크기(높이 동서 길이 3.15m, 남북 너비 2.0m, 높이 2.32m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6년
소재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우산촌 1대
정의

중국(中國)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태왕진(太王鎭) 우산촌(禹山村) 우산하 고분군(禹山下古墳群)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

개설

우산하 1041호 고분통구 고분군(通溝古墳群)의 6개 권역 중 하나인 우산하 고분군(禹山下古墳群) 내에 있는 무덤이다. 제작 연대는 5세기 후엽이며, 백회를 바르고 생활풍속도를 그린 벽화고분이다.

위치

우산하 1041호 고분은 태왕진 우산촌 1대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우산 묘구의 중부에 해당하며, 우산 남쪽 기슭 전방의 완만한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큰 도로가 있고, 도로 건너편은 평탄한 농지이며,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지점에 태왕릉(太王陵)이 있다.

형태

우산하 1041호 고분은 방단 계단식 석실분[방단 계제 석실분(方壇階梯石室墳)]으로 한 변의 길이는 약 24m, 너비는 약 21m, 높이는 약 3m이다. 무덤칸은 거대한 화강암 판석을 이용해서 축조하였으며, 평면은 장방형으로 동서 길이 3.15m, 남북 너비 2.0m, 높이 2.32m이다. 고분 아래의 기초, 고분 밖의 계단, 고분 안의 채움돌, 벽화가 그려진 묘실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된 벽화고분이다.

출토 유물

일찍이 도굴을 당했기 때문에 남아 있던 인골과 유물은 대부분 묘실 앞부분에 쌓여 있던 삼합토에서 출토되었다. 유물은 묘도 가운데와 묘실 안에 쌓여 있던 숯의 상층부에서도 발견되었다. 유물은 대부분 부속품에 해당하는데 전체적으로 개갑(鎧甲)과 마구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외에 황색시유도기편과 관곽(棺槨)의 부속품도 적지 않게 출토되었다.

특징적인 유물만 짚어보면, 금실 두 단, 금동제 십자형운주(圓泡十字形帶具), 금동제 입식부운주(繼管葉的花飾), 금동제 못, 금동제반원형장식, 금동제 능형(菱形)장식, 금동제 부채형장식, 금동제 당두(擋頭), 금동제 사미(鉈尾), 은제 팔각기둥형 장식, 은제 못이 출토되었다.

또 철제 안교(鞍橋), 철제 등자, 철제 안판(鞍板) 장식, 철제 띠고리, 철제 찰갑편, 철제 꺽쇠, 철제 창, 철촉, 철제 추, 철제 당두, 철제 못, 철제 벽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시유도기편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모두 니질의 옅은 홍색이고, 황록색 유약을 발라 광택이 난다. 도제 부뚜막도 나왔다.

그 외에 견직물로 추정되는 직물조각과 칠피 잔편, 암키와 조각이 나왔다. 발바닥 뼈, 손가락 뼈, 팔다리 뼈, 머리뼈 등의 인골도 묘실 앞 부분에 쌓여 있는 삼합토에서 발견되었다.

현황

우산하 2114호 고분은 파괴 상태가 심하여 봉분의 원래 형태를 판별하기는 쉽지 않다. 분구를 덮은 자갈의 정황 등을 볼 때 원래는 방형 기단을 갖추고 있었다고 추정한다. 현재 중앙 부분에 무덤칸의 개정석이 노출되어 있지만, 주위의 자갈이 쌓인 높이를 참고해 볼 때, 분구의 자갈은 원래 무덤칸의 꼭대기 부분도 덮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벽화의 상태는 박락이 심하여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어떠한 문양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묘실 네 모서리에 자홍색 기둥과 지붕을 받치는 들보 등이 그려져 있고, 묘실 남·북 양 벽 상단에 연화문이 그려져 있다. 동벽 아래 청회색 가옥이 있고 처마 아래 황색 장막이 늘어져 있으며, 장막 아래 가운데 부분에서 남쪽으로 치우친 곳에 남자 묘주(墓主)가 그려져 있다. 묘주는 남쪽을 향해 약간 돌아서 있는데, 황색 바탕에 붉은 점무늬 옷을 입고 있다. 홍색으로 옷의 테두리를 둘렀다. 두 눈은 길고 가느다랗고 코는 곧고 콧수염은 약간 휘었으며, 입술은 선홍색을 띠고 있다. 형상을 윤곽한 묵선은 꼼꼼하면서도 힘차고 눈과 눈썹 부분의 운필은 가늘며 면 부에는 색을 덧칠해서 갈무리했다. 동벽 전체는 묘주가 집에서 연회를 베푸는 장면이다.

북벽에 보이는 들보 아래에는 정면에서 바라본 모양의 연화문 8송이가 배열되어 있는데, 안에서 밖으로 홍색과 녹색을 번갈아 그렸다. 안쪽 6송이의 중심에는 구멍이 파여 있다. 그 아래의 가운데에는 적갈색 사슴 뒷부분이 남아 있다. 그 아래쪽으로는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인 사람이 있다. 고깔같은 절풍을 쓰고 있는 듯하며, 주황색 바지를 입었고 자홍색 장화를 신었다. 다시 안쪽으로 기둥에 바짝 다가선 지점에 사람이 보인다. 방책을 썼고 맞섶 옷을 입었으며 허리띠를 매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수렵도 계통으로 파악된다. 이외에 엇갈려 있는 나뭇가지와 녹색 낙엽들이 있다.

그러나 2008년 조사시에는 동북 모서리의 인물에서는 주사(朱砂)로 그린 바닥 선을 볼 수 있는 정도였고, 사슴 아래 있던 인물은 허리 부분 이하만 남아 있으며, 나뭇가지는 흐릿해져 판별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남벽은 박락이 심하여 벽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중앙에서 바깥으로 치우친 하부에 사람이 한 명 있는데, 황색 맞섶 옷을 입었다. 북벽의 연화문과 대응하는 상단에 6개의 작은 구멍이 있는데, 연화문이 그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조사 당시에는 남벽의 벽화가 전부 박락되어 있었다.

관대에는 백회가 발라져 있고 얼룩덜룩한 자홍색도 남아 있으나 어떤 도안인지는 알 수 없다. 개정석에도 벽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우산하 1041호 고분에 대해 길림성 박물관 문물공작대(文物工作隊)에서는 무덤칸의 평면 구조, 장벽 아래에 있는 기초석 등이 장군총(將軍塚) 및 제1호 배총과 유사하다고 보고있다. 구조에 있어서 정교함이 더해졌고 무덤칸 바닥부는 지표보다 높지 않다. 제작 연대는 4세기 중~말엽 설, 5세기 설, 5세기 중엽 설, 5세기 후엽 설로 나눠져 있는데, 5세기 후엽 설이 우세한 상황이다.

우산하 1041호 고분은 돌을 쌓아 봉분을 조성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채용하며 보수성을 농후하게 보이는 반면, 내부의 고분벽화는 유행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모순적인 현상은 신구 교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일부 학자는 적석묘와 봉토묘의 축조 시기가 완전히 달랐다고 보지만, 이 고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산하 1041호 고분은 고구려 묘제의 양식 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학술적인 의미가 매우 크다.

참고문헌
  • 吉林省博物館文物工作隊, 「吉林集安兩座高句麗墓」(『考古』1977-2, 1977)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1984
  • 魏存成, 신용민 역, 『高句麗考古』(삼성문화재단, 1996)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洞溝古墳群-1997年調査測繪報告-』(科學出版社, 2002)
  • 方起東·劉萱堂, 「集安下解放第31號高句麗壁畵墓」(『北方文物』2002-3, 2002)
  • 孙仁杰·迟勇, 『集安高句麗墓葬』(香港亞洲出版社, 2007)
  • 耿鐵華, 『高句麗 古墓壁畵 硏究』(吉林大學出版社, 2008)
  • 전호태, 「고구려 집안권 벽화고분의 현황과 과제」(『울산사학』 14, 울산사학회, 2009)
  • 여호규·강현숙·백종오·김종은·이경미·정동민,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유물Ⅴ 통구분지2 마선구·산성하고분군-벽화고분』( 동북아역사재단,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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