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총

한자 西大塚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마선향 건강촌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고분
양식 계단식 돌무지굴방무덤[계단적석광실묘]
크기 동측과 북측 길이는 53.5m, 서측 길이 56.7m, 남측 길이 62.5m, 현존 높이는 11m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13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35년 5월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35년 9월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36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38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6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3년
소재지 길림성 마선향 건강촌 5조N : 41° 5′ 44.07″E : 126° 7′ 39.99″
정의

길림성 집안시 마선구 지역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

개설

서대총통구 고분군의 6개 권역 중 마선구 고분군 내에 있다. 4세기 초에 축조된 왕릉급 무덤으로 미천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형태는 계단식 돌무지 굴방무덤[계단 적석 광실묘]이다.

위치

서대총마선구 고분군의 서단, 즉 마선향(麻線鄕) 건강촌(建江村) 5조(組)의 북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고분이 자리한 곳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산지의 완만한 비탈지로, 고분의 높이 차이가 비교적 크다. 고분 북쪽은 비탈 위로 해발 211.49m이고, 남쪽은 비탈 아래로 해발 201.45m이다. 고분은 북쪽으로 안자령(安子嶺)에 기대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압록강과 약 500m, 동쪽으로는 집안시구와 약 5.5㎞ 떨어져 있다. 집안-단동 간 도로가 고분과 압록강 사이를 동서로 통과한다. 동북 약 1㎞ 떨어진 지점에는 마선구 626호 고분이 있고, 동쪽 약 2㎞ 지점에 위치한 도로 남쪽에는 천추총이 자리하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서대총은 청말(淸末)에 주민들에 의해 발견되어 ‘서대묘’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1913년 조선 총독부의 촉탁을 받은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이마니시 류[今西龍], 야쓰이 사이이치[谷井濟一], 구리야마 슌이찌[栗山俊一] 등이 조사하였는데, 전부 붕괴되어 돌산처럼 보였다고 한다.

1935년 5월에는 만주국 문교부의 위촉을 받은 미야케 토시나리[三宅俊成], 이토 이하츠[伊藤伊八] 등이 광개토왕비를 살펴보면서 서대총도 겸하여 조사하였다. 이어 1935년 9월에도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하마다 고사쿠[浜田耕作] 등이 조사하였고, 1936년에는 이케우치 히로시, 하마다 고사쿠,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등이 다시 조사하였다. 그리고 1938년에는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노모리 겐[野守健], 사이토 다다시[齋藤忠] 등이 여러 고분의 배치 상태와 실측을 시행하였는데, 이때 서대총의 실측도 및 고분 배치도가 작성되었다.

1966년에는 길림성 박물관과 집안현 문물보관소가 통구 고분군에 대한 전면 조사를 실시한 뒤, 이 고분을 마선구 500호 고분[JMM0500]으로 편호하였다. 이후 2003년에는 길림성 문물 고고 연구소와 집안시 문물보관소가 집안 고구려 유적의 환경 복원 작업 중에 서대총에 대해서도 실측을 포함한 정밀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묘역(墓域) 안의 기타 유적을 이해하기 위해 무덤 주위에 6개의 탐색갱을 파냈다. 이때 동기·철기·토기·석기 등 38건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형태

서대총은 계단식 돌무지 굴방무덤으로 평면은 사다리형(梯形)이다. 고분이 변형된 상황이라 사면의 둘레는 차이가 있는데, 동측과 북측의 길이는 각기 53.5m, 서측 길이 56.7m, 남측 길이 62.5m이며 현존 높이는 11m이다.

도굴로 인해 현재 무덤 정상부에는 깊은 구덩이가 형성되었고, 매장부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라서 축조 방식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도굴 구덩이 안팎에서 가공이 비교적 잘 된 방형의 석재가 보이지 않고, 천정막음돌 및 자갈돌도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매장부는 석실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정연한 광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서대총 내부는 크기가 다른 산자갈로 쌓았고, 외부는 정연하게 다듬은 계단면석을 둘러쌓았다.

서대총의 계단은 층층이 안으로 들여쌓았는데, 두 계단 사이에는 깬돌과 강자갈을 쌓아 덮었다. 계단 석재로는 화강암·사암·회암 등 3종이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화강암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상부에는 사암을 많이 사용하였고, 하부에는 회암을 섞어 사용하였다. 계단 축조에는 큰 것은 길이 1.5~2.7m, 높이 0.6~1m 정도, 작은 것은 길이 1m, 높이 0.5m 정도의 돌을 사용하였으며, 계단 내부에는 깨진 돌을 채워 넣었다. 현재 계단은 동북 모서리에서 11층, 동남 모서리에서 4층, 서북 모서리에서 5층, 서남 모서리에서 4층이 확인되었다. 여섯째 층부터는 깨진 기와가 많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분구 정상부에 목조 가옥형 구조물 즉 묘상 건축(墓上建築)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서대총 부근에서는 상관 유적들도 상당수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고분 북쪽에서는 녹색 입석판(立石板)이 발견되었는데 천추총·태왕릉·마선구 2100호 고분에서도 발견된 것으로, 이는 제사와 관련된 유적에 속한다. 다음으로 고분 북측의 제1단 계단 밖에서는 길이 55m, 너비 0.5m, 깊이 0.3m 정도의 배수구가 발견되었다. 또 고분 북쪽 40.5m 지점에서는 고분과 서로 평행하게 강자갈로 쌓은 돌담장 유적, 이른바 능장(陵墻) 유적이 발견되었다. 담장의 현재 길이는 39m, 너비 2m 정도이다. 담장 주위에서 기와가 나오고 있으므로 담장 위에 기와를 얹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서대총 동쪽 40m 지점에는 너비 17m, 현재 높이 0.6m에 길이는 서대총의 동변 길이와 비슷한 장방형의 제대가 있다.

출토 유물

2003년 서대총 정리 작업 중에 토기·청동기·철기[5건]·석기·금동기[12건] 등 유물 38건이 출토되었다. 대부분 고분 아래의 흘러내린 돌무지에서 나왔고, 어떤 것은 묘상의 계단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금동기는 주로 서쪽의 돌무지에서 나왔는데, 대롱모양장식[관식(管飾)] 1건, 보녀 장식[보요식(步搖飾)] 1건, 단추 장식[포식(泡飾)] 7건, 기타 3건 등 총 12건이었다. 철기는 대다수가 묘장 아래의 돌에서 출토되었으며 공구와 마구가 있었다.

그 밖에 무덤 위아래에서 대량의 수키와와 암키와가 채집되기도 하였다. 수키와와 암키와 모두 두꺼운 것과 얇은 것 두 종류가 다 있었으며, 와당의 경우에는 8등분의 새털구름무늬[권운문(卷雲文)] 도안이었다. 암키와는 대부분 무늬가 없는 것이었다.

현황

서대총은 일찍이 도굴당해 심하게 파괴된 상태이다. 고분 중앙에는 남북 방향으로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는데, 그 깊이가 7m 정도로 고분 바닥에 이를 정도이다. 매장부는 이미 완전히 없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도굴되어 드러난 석재는 대부분 남측을 향해 쌓여 있으며, 길이 약 40m 정도의 타원형 돌무지를 형성하고 있다.

도굴로 남측의 상부 계단은 파괴되었고, 주위에는 백회가 묻은 석재가 흩어져 있다. 서측 중간 부분에는 대량의 작은 강자갈이 발견되었는데, 매장부 바닥부에 깔린 돌이 집중적으로 무너진 곳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도굴 구덩이가 너무 깊어져 외부의 장력이 지나치게 커진 결과, 묘장 동측과 서측의 남쪽 계단은 안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졌으며, 동남쪽 및 서남쪽 모서리 역시 안쪽으로 기울어졌다. 북측은 높은 지대이기 때문에 변형 정도가 가장 적다.

의의와 평가

서대총은 초대형 계단식 굴방무덤[계단 광실묘]으로서 고분의 입지나 규모, 출토 기물 등을 통해 보면 왕릉으로 추정된다. 묘장 형식을 보면 천추총보다는 이르고, 칠성산 211호 고분보다는 늦다. 서대총에서 발견된 와당 중에는 ‘기축(己丑)’이란 간지가 새겨진 것이 있다. 이때 기축년이란 329년을 말한다. 그러므로 서대총의 무덤 주인은 4세기 전반 무렵의 왕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31년에 미천왕이 죽었다고 하였는데, 서대총미천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서대총의 파괴 정도가 매우 심한 것도 이 무덤이 미천왕릉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342년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입하며, 미천왕릉을 도굴하여 미천왕의 시신을 탈취해 간 일이 있기 때문이다. 심각한 훼손 정도는 당시의 도굴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고 여겨진다. 서대총을 미천왕릉으로 보는 데에는 현재 각국 학계에서도 큰 이견이 없다.

서대총은 4세기 전반 고구려 왕릉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왕릉의 영역을 획정하는 능장이나 제대 유적의 존재, 그리고 무덤 위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기와를 통해 무덤 위에 건축물이 세워졌을 가능성을 종합해 본다면, 서대총은 4세기 고구려 능원제(陵園制)의 면모를 살펴보기에도 좋은 사례라 하겠다.

참고문헌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集安高句麗王陵』(文物出版社, 2004)
  • 孫仁杰·遲勇 지음, 동북아역사재단 번역, 『집안 고구려 고분』(동북아역사재단, 2007)
  • 동북아역사재단 편,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유물Ⅱ-집안 통구분지편』(진안진, 2008)
  • 동북아역사재단 편,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2-고분과 유물-』(동북아역사재단, 2009)
  • 여호규, 「집안지역 고구려 초대형적석묘의 전개과정과 피장자문제」(『한국고대사연구』41, 한국고대사학회, 2006)
  • 임기환, 「고구려의 장지명 왕호와 왕릉 비정」(『고구려 왕릉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9)
  • 東潮, 「고구려 왕릉과 능원제」(『고구려 왕릉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9)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