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七星山 871號 古墳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유적/고분 |
| 지역 |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 성격 | 고분 |
|---|---|
| 양식 | 계장식 돌무지 무덤 |
| 관련인물 | 태조왕, 동천왕, 산상왕, 신대왕, 고국천왕 |
| 크기(높이 | 높이 5∼10m |
| 지름) | 북면, 남면의 길이 46m, 동면의 길이 48m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6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0년대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7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3년 5월∼7월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4년∼2005년 |
| 소재지 | 칠성산 고분군, 칠성산 언덕 북위 41°7′1.38″, 동경 126°9′52.01″ |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칠성산 동쪽 기슭에 있는 고구려 무덤.
칠성산 871호 고분은 통구 고분군(通溝古墳群) 중 칠성산 고분군에 속한 고구려 시기 돌무지무덤이다.
칠성산 871호 고분은 집안시에서 서쪽으로 1㎞ 정도 떨어진 칠성산 고분군의 북쪽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고분이 위치한 곳은 서북이 높고 동남이 낮은 산비탈이다. 중심 지리 좌표는 북위 41°7′1.38″, 동경 126°9′52.01″이며, 무덤 정상의 해발 고도는 232.06m이다. 북쪽은 높은 산에 의하여 둘러 막혀 있고 동쪽과 남쪽은 넓게 트인 지역이다. 동쪽으로는 국내성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서쪽으로 5㎞ 가면 압록강에 합류하는 마선하(麻線河)가 있다. 무덤에서 남쪽으로 1㎞ 떨어진 곳에 칠성산 211호 고분이 있고, 동북쪽으로 2㎞ 떨어진 통구하 건너편에는 산성하 벽돌 공장 36호 고분이 있다.
1966년 길림성 박물관, 집안현 문물보관소가 고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1980년대에는 여러 차례 집안현 문물보관소가 고분을 조사하였고, 왕릉으로 비정하였다. 1997년 길림성 문물 고고 연구소, 집안시 문물보관소에 의한 조사에서 칠성산 871호 고분을 한 변 너비 35m, 높이 5.5m의 특대형 계단식 적석 석광묘로 파악하였다.
2003년 5월∼7월에는 길림성 문물 고고 연구소, 집안시 문물보관소를 중심으로 정리 작업이 이루어졌다. 연구 책임자는 집안시 문물보관소손인걸(孫仁杰)이었다. 고분에서 흘러내린 돌과 잡풀을 정리하였으며 고분 주변에 대한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조사에서 유물 6점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이 기와편이다. 2004년∼2005년에는 장복유(張福有)·손인걸·지용(遲勇) 등이 여러 차례 조사를 실시하였다.
무덤의 평면도는 남쪽이 둥근 장방형이며 긴축이 남북 방향으로 놓인 계장식 돌무지무덤이다. 무덤의 크기는 북면과 남면의 길이가 46m, 동면이 48m이며, 높이는 5∼10m이다. 무덤은 계장식 방법으로 쌓았다.
먼저 지면을 고르고 초석을 깐 후 안쪽부터 지형에 맞게 담을 쌓는 방법으로 기단을 쌓았다. 기단의 대부분은 무너졌으나 비교적 지세가 높은 북쪽 면과 동쪽 면에는 좀 남아 있다. 기단은 서쪽 면에 8개, 북쪽 면에 10개, 동쪽 면에 12개가 남아 있다. 남쪽 면은 많이 손상되었다.
북쪽 면 기단의 맨 윗 단[열 번째 기단]은 길이가 0.6m이고 너비가 0.25m인 규모 있는 자연석을 0.4m 높이로 쌓았는데 무덤의 동북 모서리와 동쪽 면의 12번째 기단과 연결되어 있다. 아홉 번째 기단은 열 번째 기단에서 밖으로 1.5m 떨어진 곳에 1.2m의 높이로 쌓였는데 그 높이가 열한 번째 기단보다 0.4m 낮다. 이 단의 동쪽 끝은 동쪽 면의 열 번째 기단과 연결되어 있다.
여덟 번째 단은 아홉 번째 단에서 밖으로 1.4m 떨어져 2m 높이로 쌓았다. 여기에 쓰인 돌은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이다. 크기는 대체로 0.3∼0.6m, 너비 0.3∼0.4m, 두께 0.2m 좌우이다. 일곱 번째 단은 여덟 번째 단에서 밖으로 1.7∼1.8m 떨어진 곳에 2m 높이로 쌓았으며 여섯 번째 단은 일곱 번째 단에서 밖으로 1.2m 떨어져서 1.9m 높이로 쌓았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맨 밑단[첫 번째 단]까지 쌓았다.
끝단은 지표 위에 직접 두 번째 단과 1.3m 떨어져 1m 높이로 쌓았는데 여기 쓰인 돌의 크기는 0.8×0.6×0.4m이다. 이 단의 서쪽 끝과 서쪽 2단이 서로 연결되었고 동쪽 끝과 동쪽 면 1단은 연결되었다. 다른 면의 축조 방법 역시 북쪽 기단과 같다. 기단 바깥에는 보호석을 세워두었다.
고분의 서북쪽에 판석을 평평하게 깔아놓았다. 판석의 길이는 0.5∼0.8m이며 너비는 0.4∼0.6m, 두께는 0.2∼0.2m 가량이며 표면은 상당히 평평하다. 서면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판석은 고분의 밑면에서부터 깔았고 너비는 대개 6m 정도이다. 묘역을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의 북쪽에서 11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1966년 조사 당시 칠성산 묘구 1307호묘로 편호되었으나 1997년의 재조사 때는 판단이 어려워 취소하려고 하였다. 고분은 장방형이고 동서로 향해 있으며 남아 있는 부분의 길이는 20m이다. 방향이 칠성산 871호 고분의 북변과 일치한다. 왕릉 부근에 배장묘가 있는 것은 고구려묘제의 한 특징이다. 칠성산 871호 고분의 경우 그 형태를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태왕릉(太王陵), 서대묘(西大廟), 우산하 992호 고분의 예를 보면 이 시설 역시 제대(祭臺)로 추정된다. 고분의 서북쪽에서 22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며 방향은 칠성산 871호 고분의 서변과 일치한다. 2003년 발굴 당시 지표에서 암키와, 수키와, 그리고 용석 등이 출토되었다. 이 중 우진각 지붕을 가진 건물 모형 도자기 조각과 동물 머리 모양 장식이 있는데 이들은 보기 드문 귀한 유물이다. 전면적인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구조를 상세하게 알기 어려우나 능사(陵寺)와 같은 건물지이거나 능원 담장의 문지로 추정된다.
칠성산 871호 고분은 일찍이 도굴당한 고분인 만큼 남아 있는 유물이 많지 않다. 전해지는 유물로는 철 화살촉, 찰갑 그리고 기와편 등이 있다. 출토된 보요 장식은 보요에 매다는 작은 장식으로 보인다. 둥글고 얇은 금동판 형태이며 윗부분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직경은 2.7㎝, 두께는 0.1㎝이며 구멍의 직경은 0.15㎝이다.
금동제 장식품도 2점이 출토되었는데 장방형의 얇은 금동판으로 둘 다 모양은 비슷하다. 양쪽에 작은 구멍들이 많이 뚫려 있고 가운데 그보다는 큰 구멍 두 개가 뚫려 있다. 금동 판의 길이는 각각 6㎝와 5.5㎝이며 두께는 3.1㎝로 같다. 구멍의 직경은 0.3㎝이다.
1점 출토된 찰갑은 장방형으로 찰갑을 옷에 붙일 수 있도록 두 개의 구멍이 나 있다. 크기는 길이가 3.9m, 너비가 3.7m이며 구멍의 직경은 0.2㎝∼0.4㎝이다. 철 화살촉은 편평하며 뾰족하기가 규형(圭形)에 가깝다. 길이는 1.8㎝, 너비는 0.8㎝, 두께는 0.12㎝이다. 철제 칼장식도 출토되었는데 사각 송곳 형태이며 아랫부분 일정 구간은 속이 비어 있다. 전체 길이는 7㎝, 직경은 1.1㎝이다.
고분의 주변에서는 기와편도 여러 점 수습되었다. 기와의 대부분은 회색이고 홍색 혹은 갈색이 일부를 차지한다. 암키와의 겉면에는 새끼줄무늬[승문(繩文)]이 있고, 내면에서는 베무늬[포문(布文)]이 있다. 일부 기와에서는 손가락으로 무늬를 낸 흔적을 볼 수 있다. 수키와 역시 안쪽에 포문(布文)이 있다.
칠성산 871호 고분은 그 규모가 상당하며, 지리적 위치 역시 고분의 입지로 탁월하다. 또한 주변에 다른 고분이 없이 홀로 존재하며 배장묘, 능역, 건물지 등의 부속 시설이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칠성산 871호 고분은 고구려의 왕릉으로 이해된다.
고분의 축조 방법은 안에서 밖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쌓아나가는 계장식이다. 이는 밖에서 안을 채워가며 쌓는 계단식보다는 이른 시기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고분의 기단이 모서리에서 딱 맞지 않는다거나 계장과 계장 사이의 거리가 일정하지 않은 점, 사용된 석재가 대부분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이라는 점 역시 이 고분이 이른 시기에 조영되었음을 말해준다.
장복유·손인걸·지용 등은 칠성산 871호 고분을 태조왕릉으로 보았고, 『집안 고구려 왕릉(集安高句麗王陵)』에서는 동천왕릉에 비정하였다. 위존성(魏存成)은 산상왕릉으로, 임기환은 신대왕이나 고국천왕의 무덤일 것이라 보았다. 구체적인 비정에는 차이가 있으나 칠성산 871호 고분을 왕릉으로 보는 것 자체는 학계의 동의를 얻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