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선구 석묘자 석굴

한자 麻線溝 石廟子 石窟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마선향 석묘자촌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능묘(비정)
양식 석굴
관련인물 민중왕
크기(높이 4m(현재)
길이 (석굴깊이) 5m
둘레) (석굴너비) 8m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4년∼2005년
현 소재지 집안시 마선향 석묘자촌북위 41°5′595″, 동경 126°07′308″
정의

길림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 집안시(集安市) 서쪽 석묘자촌(石廟子村)에 있는 석굴.

위치

마선구 석묘자 석굴이 위치한 석묘자는 국내성(國內城)에서 10㎞ 정도의 거리에 있다. 국내성에서 통구하(通溝河)를 건너 마선향(麻線鄕)으로 4㎞를 가고, 다시 석묘(石廟) 방향으로 6㎞를 가면 도착한다. 마선하는 대판분령(大板盆嶺)에서 발원하여 굽이쳐 흐르다가 석묘자촌(石廟子村) 1조(一組)를 지날 무렵 남쪽으로 흐르며, 남으로는 압록강으로 유입된다. 여기에 C자형의 소규모 평원(平原)이 형성되어 있다. 평원의 남북 길이는 1,300m이며 동서 너비는 250m이다. 환도 산성 서쪽 담장에서 이어지는 산등성이는 서쪽으로 약 3500m 지점에서 마선하의 좌안 소평원의 동단에 이르는데 산봉우리가 점점 낮아지면서 끝에 와서는 단애(斷崖)가 형성되어 있다. 석굴은 바로 이 절벽 중간 부분에 있다. 석굴 입구의 좌표는 북위 41°5′595″, 동경 126°07′308″이며 해발은 227.46m이다.

형태

석굴의 남북 너비는 약 8m이며, 남쪽이 약간 낮다. 동서 방향의 석굴 깊이는 약 5m이고, 높이는 4m 정도이다. 석굴의 모양이 호랑이 입과 비슷하다고 하여 노호취(老虎嘴)라 불리기도 한다. 석굴 바닥에는 산자갈[碎山石]이 널려 있었으나 인공적인 굴착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석굴 남쪽 25m 지점의 평지에는 비교적 많은 수의 홍색 암키와와 수키와가 흩어져 있으며 와당은 발견되지 않았다. 암키와의 배면에는 방격문(方格紋), 석문(席紋)이 시문되어 있으며 안쪽에는 포문(布紋)이 있다. 수키와의 바깥쪽은 광택이 나며 안쪽에는 역시 포문(布紋)이 있다. 기와의 분포 범위는 남북 20m, 동서 15m 안팎이다. 지표 색깔과 표면의 융기를 고려하면 유적의 범위는 약 300㎡ 내외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석굴을 조사, 정리한 장복유 등 중국 학자들은 석묘자 석굴을 민중왕릉으로 비정하며 근거로 네 가지 정도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민중원(閔中原)의 ‘민(閔)’은 ‘미(微)’라는 의미도 갖고 있으므로 민중원은 작은 규모의 평원일 것이다. 또한 고구려에는 ‘국남(國南)’, ‘국북(國北)’, ‘국동(國東)’의 명칭은 있지만 ‘국서(國西)’라는 말이 없다. ‘국(國)+방향’ 대신 ‘민중원’이라 한 것은 이 곳이 국내성의 서쪽, 즉 ‘국서(國西)’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중원은 국내성 서쪽의 작은 평원에 비정할 수 있다. 국내성 서쪽에 위치한 마선 석묘자 지역은 남북 1300m, 동서 250m의 소평원으로 국내성 근처에서 민중원에 가장 부합하는 위치이다. 바로 이 곳에 있는 석굴이 석묘자 석굴로 이는 민중왕의 장지로 볼 수 있다.

둘째, 석묘자 석굴은 무덤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민중왕이 사냥하다가 발견했다는 석굴일 가능성이 매우 크며 산을 능(陵)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고구려는 묘상(廟上)에 기와를 쓴다는 기록이 있다. 석묘자 석굴 인근의 평지에서는 상당수의 암키와, 수키와가 발견되었다. 석묘자라는 지명은 아마도 이것 때문에 생겼을 수도 있다. 이 지역의 기와는 그 수가 상당하고 범위 역시 넓기 때문에 중요하다. 석굴 근처의 기와는 석굴과 관련이 있다. 『구당서』에서는 “고구려에서는 불사(佛寺)와 신묘(神廟), 왕궁(王宮), 그리고 관부(官府)에만 기와를 쓴다”고 하였다. 이 유적은 불사, 왕궁, 관부로 볼 수 없으므로 신묘(神廟)에 해당하며, 신묘이거나 관리 시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넷째, 석묘자라는 지명 역시 민중왕을 장사지낸 석굴과 그 앞의 묘당(廟堂) 때문에 붙여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즉 지명에서도 석묘자 석굴이 장지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재고의 여지가 많으며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첫째, 장복유 등의 학자들은 민중원을 국내성 서쪽[國西]의 소평원으로 비정하였다. 석묘자 석굴은 국내성 서쪽 지역, 즉 민중원에 있는 석굴이니 민중왕의 무덤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민중원이 이른바 국서(國西)에 있다는 주장은 추정일 뿐 문헌적 근거가 없다.

둘째, 석묘자 석굴이 민중왕릉이라는 중요한 근거로 인근 평원의 기와를 들고 있다. 물론 석굴 근처에서 나온 기와는 그 일대에 건물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석굴 앞에 건물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석굴이 왕릉임을 말해주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또한 장복유 등은 『구당서』 등을 들어 고구려에서는 불사(佛寺), 신묘(神廟), 왕궁(王宮), 관부(官府)에만 기와를 썼고, 이 지역의 건물은 이 넷 중 하나일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건물에는 홍색 기와를 썼지만 무덤에서는 회색 기와를 주로 썼던 점을 생각하면 이 건물이 무덤과 관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셋째, 석묘자 석굴에서는 매장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다. 석묘자 석굴이 무덤이라면 내부에 매장 시설, 혹은 그 흔적이 보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매장부가 없다는 사실은 이 석굴이 매장 시설, 즉 무덤이 아닐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넷째, 석묘자 석굴 근처에서 고구려고분이 발견되기는 한다. 그러나 후기 형식인 석실 봉토분이어서 민중왕 시기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인근에서 발견되는 고구려고분 역시 석묘자 석굴이 민중왕릉이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되기 어렵다. 따라서 석묘자 석굴이 의미 있는 고구려의 고분일 수는 있으나 왕릉으로 비정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근거가 필요하다 생각된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구당서(舊唐書)』
  • 孙仁杰·迟勇, 『集安高句麗墓葬』(香港亞洲出版社, 2007)
  • 장복유·손인걸·지용, 「고구려 왕릉 통고 요보」(『동북사지』 2007-4)
  • 장복유·손인걸·지용, 『고구려 왕릉 통고』(홍콩 아세아 출판사, 2007)
  • 서길수, 「중화인민공화국 학자의 고구려 왕릉 비정에 대한 비판적 고찰」(『고구려 발해 연구』 29, 고구려 발해 학회)
  • 강현숙·백종오·여호규 외,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유물 2-집안 통구 분지편』(동북아역사재단, 2011)
  • 백종서, 「석묘자 석굴」(『태왕의 나라 고구려 유적』(이도학·박진호·송영대 편), 서경 문화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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