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良民 古墳群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유적/고분 |
| 지역 |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 성격 | 고분군 |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4년 5월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5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4년 6월 3일, 6월 7일, 6월 19일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5년 4월 17일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6년 4월 5일 |
| 소재지 | 길림성 집안시 동북 45㎞ 지점, 압록강 중상류 |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청석진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군.
양민 고분군은 집안시 동북쪽 약 45㎞ 떨어진 압록강 중상류 일대의 충적 평원의 가운데 위치한다. 유적이 위치한 청석진(靑石鎭)은 압록강 물이 상류로부터 굽이쳐 흐르다 높은 산에 막혀 반원형의 만(灣)을 형성한 지역으로, 남북 길이 2㎞, 동서 너비 1.5㎞ 범위 내에 고분군이 분포한다. 이 고분군은 1964년에 운봉댐 건설 때 길림성 박물관과 집안현 박물관이 170여 기 고분을 확인하면서 알려졌다. 원래 양민 고분군은 댐의 건설과 함께 수몰되었다. 2004년에 다시 댐 북쪽의 산기슭을 새로 발굴하였는데 이 지역은 이전의 고분군과 구별하기 위해 양민전자(良民甸子) 유적이라고 한다.
1964년 5월, 운봉(云峰) 댐을 지으면서 길림성 문물공작대가 압록강 중상류 지역의 문물과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때 집안 경내의 양민(良民), 추피(秋皮), 석호(石湖), 화피(桦皮) 등지에서 고구려고분 205기를 발굴하였다. 이 중 양민 고분군에서는 170기가 발견되었다. 1965년 운봉 저수지가 완공된 후 이 일대의 고분과 기타 중요한 유적은 모두 수몰되었다.
2004년 6월 3일, 6월 7일, 6월 19일, 장복유(張福有)의 지도 아래 정원(程遠)[집안시 문련(文聯) 주석], 지용(遲勇), 손인걸(孫仁杰) 등 네 명이 조사단을 꾸려 세 차례에 걸쳐 양민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 조사로 고분 13기, 고성지(古城止)는 한 군데를 확인하였다. 이때 발굴된 지역을 이전의 고분군과 구별하기 위해 양민전자(良民甸子) 유적이라고 하였다.
2005년 4월 17일 운봉댐의 수위가 내려가자 장복유, 정원, 지용, 손인걸 등은 양민 고분군의 북쪽 기슭에 드러난 고분에 대한 조사, 측량, 촬영, 기록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130여 기의 고구려고분을 확인하였다. 그 중 88기의 고분에 대해서는 ‘-’호로 편호를 부여했다. 나머지 약 40여 기에 대해서는 아직 편호를 부여하지 않았다.
2006년 4월 5일 장복유, 정원, 지용, 손인걸 등은 다시 양민 고분군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번 조사의 양민 고분군이란 운봉 저수지 표준 해발 277.62m 수몰선 이상, 압록강 우안 양민 서산 언덕 표준 해발 318.75m 이하의 구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에 1,073기의 고분이 밀집해 있다.
양민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유물은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고구려 고분군은 모두 166개이며 고분의 총수는 19,772기에 이른다. 가장 큰 규모의 고분군은 역시 통구 고분군[11,494기]이며 평양 지역[1,620기]이 두 번째로 크다. 그런데 양민 고분군에는 1,073기의 고구려고분이 존재한다. 집안[통구]과 평양은 도성이었으므로 고분이 밀집해 있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양민 고분군의 경우 지방 고분군 중 특이하게 대규모이다. 또한 양민 지역에서는 남북 350∼400m, 동서 300m 전후의 성곽이 발견되었는데 이것 역시 지방의 성곽치고는 대규모이다. 이러한 성곽과 대규모 고분군 때문에 양민 지역을 동천왕대 평양성으로 보기도 한다. 관구검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성을 쌓아 백성과 묘사(廟社)를 옮긴 곳이 양민 지역이라는 것이다.
고구려 적석묘의 발전 과정은 기단이 없는 석곽묘[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기단이 있는 석곽묘[기원 전후∼3세기 후]→기단이 있는 계단식 석곽묘[2세기 전후∼5세기 전후]→기단이 있는 계단식 석실묘[4세기 전후∼5세기 전]→봉석 동실묘(封石洞室墓)[6∼7세기]로 설명된다. 또한 집안 지역의 봉토 석실분은 횡혈식 석실 형태가 먼저 수용되고 그 위에 돌을 쌓다가 흙으로 바뀌는 과정을 겪었을 것으로 보이며 시기는 대략 5세기로 볼 수 있다.
양민 고분군에는 기단이 없는 석곽묘의 비중이 높아 이 고분군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조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계단식 석실 적석묘는 적석묘 중 규모나 완성도 면에서 최상위 고분으로 볼 수 있는데, 양민 고분군에서는 이러한 고분을 찾을 수 없다. 다소 후행하는 묘제인 봉토 석실분 역시 양민 고분군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양민 지역이 초기, 아마도 집안 천도 이후 중심적인 지역으로 기능하였으나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점은 양민 고분군과 유사한 조건을 가진 장천 고분군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두드러진다. 장천 고분군은 양민 고분군과 마찬가지로 고분군과 성곽의 조합을 가지고 있다. 장천 고분군에서도 무기단 적석묘→기단 적석묘→계단 적석묘로 한 단계씩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양민 고분군과 다른 점은 최상위 고분인 계단식 석실 적석묘[장천 3호분, 장천 5호분]나 봉토 석실 벽화분[장천 1호 고분, 장천 2호 고분, 장천 4호 고분]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즉 장천 고분군 축조 세력은 고구려사 전개 과정에 발맞추어 세력을 지속적으로 유지, 확장했으나 양민 고분군의 중심 세력은 어느 순간 발전이 멈추었거나 원래 세력 자체가 미약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