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良民 古城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 지역 |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 성격 | 성곽 |
|---|---|
| 양식 | 토석 혼축 평지성 |
| 조성|건립 시기/일시 | 고구려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2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4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4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6년 |
| 훼손 시기/일시 | 1966년 |
| 현 소재지 | 길림성 집안시 양민전자N : 41° 25' 108"E : 25° 30' 044" |
길림성 집안시 양민전자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평지성.
양민 고성은 1966년 운봉댐 건설로 인해 유적이 모두 수몰되었다가 2006년 댐 수리를 위해 물을 방류하면서서 그 흔적이 드러나 존재가 알려졌다. 발견 당시 중국 언론은 성곽이 고구려나 요·금의 것과 다르다는 점에서 한대(漢代)의 토성으로 보도하였으나, 흙과 돌을 함께 다져 쌓은 토석 혼축의 고구려 평지성임이 밝혀졌다.
조위(曹魏)관구검(毌丘儉)에게 파괴된 환도성(丸都城)을 대신하기 위해 축조했다는 평양성[247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342년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에게 환도성이 다시 함락되어 파괴된 뒤, 이듬해에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겨갔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근거로 평양 동황성에 비정하기도 한다. 일대에는 고구려 무덤이 수십 기 있었다고 한다.
양민 고성은 2004년에 장백산 문화 연구회 등에서 조사하였고, 2006년 운봉댐의 물 방류로 인한 수몰 지구 노출 등으로 성곽의 현황과 축조 양상 등이 밝혀졌다.
성곽은 주 성곽과 보조 성곽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주 성곽은 방형이며, 보조 성곽은 주 성곽의 북쪽으로 압록강과 나란히 남북 방향으로 축조되었다. 주 성곽의 남북 길이는 350∼400m, 사방으로 성문이 있었으나 일본군에게 남문과 동문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보조 성곽의 길이는 약 550∼600m라고 한다.
2006년의 운봉댐 물 방류로 주 성곽이 노출되었다. 이때 조사된 내용에는 모서리가 원각(圓角)이었으며, 드러난 성벽의 상태는 상당히 양호했고, 잔존 높이가 1.5m, 너비는 4m 내외였다고 한다. 또한 서벽의 남측 부분에서 너비 6m 정도의 성문이 노출되었고, 북벽에서는 성문 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남벽과 북벽 바깥으로 해자가 둘러져 있었다고 한다.
최근 길림성 지역에서는 한대 장성의 유적을 찾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유적 조사는 요령성 왕청문진(旺淸門鎭)에서 길림성 쾌대무진(快大茂鎭)을 지나 통화시(通化市)로 이어지는 연선(沿線)에 집중되고 있다. 이수림(李樹林) 등 중국 학계는 이 연선에 소재하고 있는 고구려 시대의 유적조차 한대의 장성 관련 유적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연선이 압록강으로 이어진다고 보는데, 양민 고성을 그 하나의 사례로 적시하고 있다. 아마도 이 유적을 군현의 성곽으로 비정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후의 중국측 연구 내용에 주의가 필요한 유적이라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