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關馬 山城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 지역 |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열료향 상위촌 |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 성격 | 성곽 |
|---|---|
| 양식 | 관애 |
| 길이 | 북벽 77.6m, 남벽 69.7m, 동벽 125m |
| 문물|보호단위등급 | 현급중점문물보호단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2년 |
| 현 소재지 | 집안시 |
| 원소재지 | 집안시 |
길림성 집안시에서 통화로 향하는 도로 상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관애[차단성].
관마 산성은 관마장(關馬墻)이라고도 하며, 통화 방면에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위사하(葦沙河) 연안로를 통제하던 고구려 시대의 관애[차단성]이다. 지금까지 산성이라고 불려왔으나, 관애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하천을 따라서 생겨난 평탄한 길이 교통로가 되었다는 점에서 골짜기를 차단하여 통로를 가로막는 장벽을 시설한 것이 관애이다.
관마 산성의 수축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국내성(國內城)의 외곽에 위치하여 왕도(王都)로의 진입로를 가로막고 있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고구려 초기에 수축한 관애라고 추정된다. 아울러 위사하의 동쪽에 있는 이도구(二道溝)에도 석호 관애(石湖關隘)와 이도구문 관애가 있고, 집안의 서쪽 신개하(新開河)에는 망파령 관애(望波嶺關隘)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왕도로 진입하는 주요 교통로 상에 이들 관애를 수축하여 왕도 외곽의 방어선을 구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관마 산성은 남벽과 북벽, 그리고 동벽으로 이루어져 하나의 성보(城堡)를 형성하는 듯이 보인다. 중국 학계에서는 산성으로 분류하여 관마 산성으로 지칭하고 있으나 사방을 감싸고 내부의 공간을 이용하는 성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까지 내부의 공간에서는 건물지가 나오지 않았다. 적의 주요 침입로를 가로막는 차단성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고 판단된다.
성벽은 많이 허물어졌으며, 대체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강돌로 쌓았는데, 조금 다듬었음을 볼 수 있다. 북벽은 속칭 두도 관마장(頭道關馬墻)이라고 한다. 성벽·참호·참호벽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 끝은 위사하에서 끝나며 강 건너편은 절벽이다. 서쪽은 산기슭까지 직선으로 쌓았고, 산등성이의 암벽과 연결되어 있다. 남은 길이는 77.6m, 성벽 기초부의 너비는 10.5m, 높이는 2.3m, 방향은 240이다. 단면을 보면 바깥면을 비교적 가지런히 쌓았고,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약간 물리면서 축조하였다. 성벽 바깥쪽으로 참호가 있다. 남은 길이는 53m, 너비는 3.5m, 깊이는 0.8m이다. 참호 바깥에는 참호벽이 있는데, 남은 길이가 40m, 너비 4.8m, 높이 1.45m이다. 자갈로 기초를 다진 다음 자갈과 황토를 다시 덮었다. 북벽의 중앙부는 도로에 의해 절단되어 모두 파괴되었다. 다만 도로 서측 성벽 기초부의 돌이 안팎으로 길게 쌓여져 있는데, 너비가 24m나 된다. 본래 성문길 서벽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남벽은 이도 관마장(二道關馬墻)으로 불린다. 심하게 파괴되어 있다. 북벽과 대략 비슷한 형태이며, 중앙부는 도로로 파괴되었다. 성문 터도 파괴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참호와 참호벽은 없다. 남은 길이 69.7m, 아래 폭이 7m, 남은 높이가 2.1m이며 방향은 255이다.
동벽은 속칭 삼도 관마장(三道關馬墻)이라고 하며, 형태와 구조가 남벽과 동일하다. 북단은 목선두산(木銑頭山)의 기슭까지 뻗어있고, 남쪽으로는 약황정자산(撂荒頂子山) 등성이의 암벽까지 직선으로 쌓았다. 전체 길이는 125m, 아래 폭은 6.5~6.9m, 잔존 높이는 0.5~0.7m이다. 중앙부에 폭 4m로 트인 곳이 성문 터로 추정되는 곳인데, 양 옆의 성벽은 안팎으로 뻗어나가 길이 9.6m, 너비 3m의 한쌍의 장방형 평대를 이루고 있다. 현재 군부대가 들어서 있어 남아 있는 상태를 파악할 수가 없다.
관마 산성은 남벽을 가장 간단히 축조하고 북벽은 튼튼하게 구축하여 성벽 바깥에 참호와 참호벽을 수축해 두었다. 이를 볼 때, 관마 산성은 북쪽에서 남하하여 위사하를 거슬러 통구 분지(通溝盆地)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 시설임을 보여준다. 동벽은 북벽을 공격하던 적이 양목교자구(楊木橋子溝)를 따라 완만한 산비탈을 넘어 목선두구 방향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성벽이다. 집안 지역에서는 342년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이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때의 북치(北置)[북도(北道)]가 이 곳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남도·북도를 어느 노선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여 확정하기 곤란하다. 다만 통화 방면에서 위사하를 거슬러 집안으로 남하하는 경로가 고구려 시대 주요 교통로의 하나였음은 분명하며, 관마 산성은 이를 감제하는 차단성으로서 위사하 동쪽의 석호 관애·이도구문 관애, 집안 서북부의 망파령 관애나 압록강 연안로에 있는 관애들과 함께 차단성이라는 특징적인 고구려의 방어 체제의 일단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