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萬發拔子 遺蹟[通化市]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 지역 | 길림성 통화시 금창진 약진촌 |
| 시대 | 선사/청동기|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 성격 | 마을 |
|---|---|
| 길이 | 남북 길이 200m, 동서 너비 750m |
| 면적 | 2,500㎡ |
| 문물|보호단위등급 | 길림성 중점문물보호단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56년 3월 20일~5월 3일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58년 7월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0년 4월 16일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5년 5월, 8월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7년 5월~1999년 10월 |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1년 4월 13일 |
| 현 소재지 | 길림성 통화시 금창진 약진촌 |
길림성 통화시 금창진 약진촌에 있는 선사 시대부터 고구려 시대의 생활 유적.
만발발자 유적은 1956년 신석기 시대 유적으로 보고되었으며, 1961년 길림성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집터, 고분 등을 발굴 조사한 결과 복합 유적임을 확인하였다.
만발발자 유적은 통화시 금창진 약진촌의 혼강(渾江) 남안의 작은 구릉 정상부의 평탄면에 입지하고 있다. 통화시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3㎞ 지점에 있으며 통화-집안 도로가 유적지 아래쪽으로 지나간다. 만발발자 유적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끝단에 있는데, 산능선과 언덕산으로 이루어진 지형이 마치 자라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만발발자(王八脖子)라고 부른다. 유적지 남쪽에서 금창하(金廠河)[대묘구하(大廟溝河)]가 서북쪽으로 흘러 구릉 서면의 평원을 지나 서북 500m 지점에서 혼강으로 유입된다. 유적지의 북쪽·서쪽·남쪽 3면에는 1~2단으로 이루어진 충적 평지가 넓게 펼쳐져 잇는데 서북 방면으로 혼강 남안의 충적 평지로 이어진다. 유적지 동북부는 지세가 비교적 높고 경사도 15~20 이상으로 비교적 가파르다. 반면 서남부는 상대 고도 15m 정도의 비교적 평평하고 완만한 산등성이 위에 분포한다. 서남구 중심의 해발 고도는 400m이다.
만발발자 유적은 1997년부터 1999년까지 길림성 문물 고고 연구소에서 6,000㎡를 조사하여, 신석기 시대 후기, 청동기 시대, 고구려 초기·중기, 명대 등 다양한 시기 유구 248곳[집터 22, 고분 56, 환호 1, 수혈 등]을 발굴하였다.
만발발자 유적의 전체 면적은 2,500㎡이다. 원형 구릉의 동쪽에 집중적으로 유적이 분포하고 있으며 유물은 산기슭 아래의 지표 곳곳에 흩어져 있다. 모두 6개의 문화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거지 22기, 고분 56기, 재구덩이 160곳, 재도랑 9곳, 환호 1곳에서 유물 6,942건과 대량의 동물 유골이 발견되었다. 고구려의 문화층은 제3기~5기 문화층에 분포한다. 대체로 초기 철기 시대부터 고구려 중기 무렵이다.
대체로 청동기~초기 철기 시대의 유물 분포의 면적이 크고 풍부하다. 이와 비교해 고구려 시대의 유적은 면적은 크지만 문화 퇴적층은 얇다. 이러한 현상은 생활 유형의 변화를 반영하는데 전한(前漢) 이후 이 지역이 한냉건조한 기후로 변화하며 농업이 어려워지고 인구압이 증가해 생태 환경 압박이 크게 증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구려 초기 단계에는 환호를 구축했는데, 이는 유적지가 이미 엄밀히 조직된 대형 촌락에 속하게 되었고, 획득한 자원과 생활 공간에 대한 보호와 관리가 강화되었음을 반영한다.
만발발자 유적은 1961년 길림성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