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東團山 山城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 지역 | 길림성 길림시 풍만구 강남향 영안촌 |
| 시대 | 선사/청동기|고대/초기 국가 시대/부여|고대/삼국 시대/고구려|고대/남북국 시대/발해 |
| 성격 | 성곽 |
|---|---|
| 양식 | 테뫼식 산성 |
| 면적 | 30,000㎡ |
| 현 소재지 | 길림성 길림시 풍만구 강남향 영안촌 동단산 |
길림성(吉林省) 길림시(吉林市) 강남향(江南鄕) 영안촌(永安村)동단산에 있는 부여의 산성.
동단산 산성은 부여 전기의 왕성(王城) 구역을 방어하던 산성으로, 고구려 때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고구려가 부여의 원 중심지를 차지한 역사적 계승 관계를 보여주는 성곽이다. 동북쪽의 용담산(龍潭山) 산성과 마주하여 기각의 형세를 이루었고, 남성자 고성(南城子古城)과 그 남쪽의 모아산(帽兒山)과 함께 부여 전기의 왕성 구역에 해당한다.
동단산 산성의 수축 연대는 확정하기 어렵다. 문헌 기록은 없으나, 길림시송화강(松花江) 우안의 지역은 부여 초기 중심지인 녹산(鹿山)으로 비정되고 있고, 성 안에서 나온 유물을 통해 부여가 전기 왕성을 방어하기 위해 동북쪽의 용담산 산성에 부속하여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세기 이후 고구려가 부여의 원 중심지를 차지한 뒤에는 고구려의 부여 고지 지배와 관련되어 계속 이용되었다. 성 안에서 홍색의 새끼줄무늬[홍색승문(紅色繩文)]·바둑판 무늬[방격문(方格文)] 기와 등 고구려의 특징적 유물이 나왔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의 출토 유물로는 발해와 요·금 시대의 것들이 있어 발해·요·금 시대를 거쳐 계속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통지(盛京通志)』 기록에 따르면, 이 성은 청대 초기에는 악막성(鄂漠城)이라고 불렀고 청(淸) 중기에는 이란무성(伊蘭茂城)이라고 불렸다. 혹은 당시의 산 이름을 따서 일랍목성(一拉木城)라고도 하였다. 아마도 송화강 우안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조건에서 왕조의 교체와는 무관하게 이용되어 왔다고 추정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기 전에는 국민당군(國民黨軍)에 의해 산 정상부에 군부대 진지가 건설되기도 하였다.
동단산 산성은 길림시의 동쪽, 제2 송화강의 동안에 위치한 동단산에 있다. 그 동쪽 평지에는 남성자 고성(南城子古城)이 있고 그 남쪽으로 모아산(帽兒山)이 있다. 동북쪽으로 1㎞ 거리에 용담산 산성(龍潭山山城)이 자리잡고 있다.
동단산 산성의 축조 시기는 확정할 수 없다. 성의 구조를 살펴보면, 원래는 동쪽과 북쪽에 문이 하나씩 있었다[『성경통지』]. 현재 문지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성은 3중의 성벽으로 외성에 해당하는 바깥쪽의 성벽과 중간 부분의 성벽, 그리고 내성에 해당하는 성벽으로 이루어졌다. 바깥쪽 성벽과 중간 성벽은 비교적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나, 정상부의 세 번째 성벽은 국민당군의 토치카 건설로 파괴되었다. 대략의 성벽 길이는 바깥 성벽이 동서 230m, 남북 115m이고, 성벽 정상부의 너비는 3m 정도이며 남은 성벽의 높이는 10m 정도이다. 중간 벽의 동서 길이는 170m, 남북이 62m, 높이가 12m이다. 안쪽 성벽은 남아 있는 평대로 미루어 볼 때 동서 35.3m, 남북으로 15m이다. 안쪽 성에서 중간 성벽까지의 거리는 53.5m, 중간 성벽에서 바깥 성까지의 거리는 352m이다.
성벽의 축조는 흙과 돌을 함께 사용해 쌓았다. 산성이 위치한 동단산은 협소하지만 252m의 고도에도 불구하고 송화강에 바짝 붙어 있어 일대 평원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용담산 산성의 배후 성으로 보루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