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琿春縣 抗日 遊擊隊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항일 유격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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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 시기/일시 | 1933년 1월 |
| 해체 시기/일시 | 1934년 3월 |
1933년 훈춘현 영남 항일 유격대와 영북 항일 유격대 및 각 구 위원회 산하의 무장 부대가 연합하여 조직된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 산하의 항일 유격대.
일제의 만주 침공이 시작되자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에서는 1931년 9월 19일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를 점령할데 대한 선언’을 발표하여 유격전의 개시를 호소하였다. 10월 12일에는 중국 공산당 중앙에서 만주성 위원회에게 ‘만주 병사 공작에 관한 지시’를 보내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할 것을 지시함으로서 본격적인 항일 무장 투쟁이 전개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중국 공산당 동만 특별 위원회는 1931년 12월 연길현(延吉縣) 소명월구(小明月溝)에서 동만 각 현 당·단 열성자 회의를 개최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연길·화룡·왕청·훈춘 등지에서 항일 유격대가 조직되었다.
훈춘현 항일 유격대는 연변 4현 가운데 가장 먼저 창건된 항일 유격대로, 1932년 1월 훈춘현 위원회 군사부장 신춘(申春)의 지도로 대황구 두도령(頭道嶺)에서 별동대가 조직되었다. 별동대의 대장은 강석환(姜錫煥)이었고 대원은 15명이었다. 이후 6월말 별동대를 기초로 영북 항일 유격대[황구 유격대]가 조직되었는데 대장은 강석환이었고 정치 위원은 박두남(朴斗南)이었으며, 대원은 20여 명 정도였다.
한편 영남 유격대는 1932년 3월 중·소 국경 지대인 연통납자(煙筒砬子) 서구촌[서골]에서 20여 명로 조직된 ‘돌격대’에서 출발하였다. 대장은 강일무(姜一武)였으며, 정치 위원은 임청(林靑)[한족]이었다. 1933년 1월 훈춘현 위원회에서는 2개의 유격대를 통합하여 ‘훈춘현 항일 유격 총대’를 조직하였다. 훈춘현 항일 유격 총대의 총대장은 공헌침(孔憲琛)[한족]이었으며, 부대장은 심양동, 정치 위원은 박태익(朴泰益), 부 정치 위원은 백일평이었다. 총대 산하에 2개의 유격대대를 두었는데 제1대 대장은 공헌침, 정위는 박태익이었으며, 제2대장은 심양동, 정치 위원은 박두남이었다.
훈춘현 항일 유격대의 대원은 100여 명이었고 약 60여정의 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일부 구국군 등이 참여하고 있어서 전투경험이나 장비 면에서 다른 유격대에 비해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이들은 1932년 7월에는 사도하자의 일본인 목장을 습격하여 소 160여 마리를 연통라자 유격구로 몰고 왔으며, 10월에는 20여 명의 유격대원들이 태양촌 집단 부락을 습격하여 보총 16자루와 다량의 탄약을 노획하고 자위단 단부를 불태웠다. 또한 10월 구국군 제6려 여장 왕옥진이 일본군에게 투항할 때 13단의 연장 공헌침은 부하 15-16명을 거느리고 영북 유격대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한편 훈춘현 유격대는 1933년 9월 6일 동녕현(東寧縣) 전투를 통해 민족 진영의 이청천(李靑天)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 및 오의성(吳義成)이 거느리는 길림 구국군 및 왕청현 유격대와 함께 공동 작전을 전개하여 일제를 물리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훈춘현 항일 유격대는 연변의 훈춘현 및 왕청현 일대에서 매우 다양하고 치열한 유격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4년 3월말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방침에 따라 연변 지역의 유격대들과 함께 동북 인민 혁명군 제2군 독립사로 개편되었으며, 4월에는 2군 독립사의 제4단으로 편재되었는데 다수의 대원들이 한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