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로 군정서

한자 北路 軍政署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항일 무장 단체
설립 시기/일시 1919년 10월
해체 시기/일시 1920년 10월 이후
최초 설립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정의

1919년 10월 김좌진이 동만주 왕청현에서 편성한 독립군 단체.

개설

북로 군정서는 대한 군정서라고도 하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휘를 받는 독립운동 단체이다. 3·1 운동 이후 서로 군정서와 더불어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단체로서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중심 단체이다. 김좌진(金佐鎭)·서일(徐一) 등이 북로 군정서의 중심 인물이다.

설립 목적

북로 군정서는 1911년 3월에 서일대종교 신도들이 북간도에서 조직한 중광단(重光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3·1 운동 직후 대한 정의 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는 1919년 10월 대한 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원 제205호 결정 공문으로 명칭을 대한 군정부로부터 대한 군정서(大韓軍政署)로 바뀌었다. 북간도의 대한 군정서에 대해서는 서간도의 서로 군정서에 대비하여 공식 명칭인 대한 군정서보다 북로 군정서라는 별명을 더 자주 애용하였다.

변천

북로 군정서 독립군은 청산리 대첩 후 북만주로 이동하여 1920년 12월경 밀산에 도착했다. 이후 치타 정부의 군사 원조 약속을 받고 1921년 1월 흑룡강을 건너 노령 이만으로 갔다. 북로 군정서를 비롯한 여러 독립군 단체들은 1921년 3월 이만에서 그간 모인 독립군 부대들과 병사들 3천여 명을 모아 대한 의용군 총사령부(大韓義勇軍總司令部)를 조직하여 군사 통일을 실현하였다. 1925년 3월 북만주 지역의 군사 통일체로서 신민부를 창립함과 동시에 북로 군정서는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북로 군정서는 총재에는 서일, 부총재에는 현천묵, 사령관에는 김좌진 등이 임원으로 있었다. 일본군은 간도 침입 때 2만 5천명의 병력으로 제1단계로 1개월 이내에 한국 무장 독립군을 완전히 섬멸하고 제2단계에서는 다시 1개월 내에 촌락에 잠복하고 있는 비무장 독립운동 세력을 발본 색원해서 간도 지방의 한국 민족 독립운동을 완전히 소멸시킬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를 달성함으로써 국내 독립운동까지도 고립 차단시켜 완전히 소멸시키려고 획책하였던 것이었다.

북로 군정서 독립군의 청산리 대첩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 작전에 차질을 주어 일본군이 제2단계 목적은커녕 제1단계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고 패퇴하게 만들었다. 또한 북로 군정서만주 지방의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을 보위하고, 또 이를 통하여 국내 독립운동도 우회적으로 지켜주면서 한국 민족의 독립에 대한 확신과 독립 정신을 고양시켜 준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였다.

의의와 평가

북로 군정서는 1920년대 초, 정예 독립군으로서 청산리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다.

참고문헌
  • 박환,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 일조각, 1991)
  • 신용하,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연구」(『한국독립운동사』 2,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 신재홍, 「북간도에서의 항일독립운동-북로군정서를 중심으로」(『한국사학』 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사연구실,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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