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거류민회

한자 朝鮮人 居留民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친일 단체
설립자 김종락
설립 시기/일시 1917년 8월
해체 시기/일시 1929년 5월
최초 설립지 길림성 연길현 용정
정의

1917년 8월 재만 일본 영사관이 한인 사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설립한 친일 단체.

변천

일제에 의한 한인 거류민회 조직 움직임은 봉천(奉天)에서 시작되었다. 1912년 3월 29일 봉천성 장백부(長白府)에 거주하는 전 일진회(一進會) 회원인 김종락(金鐘洛)이 일제의 사주를 받아 조선인 민회 조직을 봉천 총영사관에 신청하였다.

김종락은 장백부 관하에 있는 임강(臨江)·무송(撫松)·몽강(濛江)·집안(輯安)·관전(寬甸)·통화(通化)·화전(樺甸)·안도(安圖)·회인(懷仁)·유하(柳河)·흥경현(興京縣) 등을 중심으로 이곳에 거주하는 한인 약 2,500호가 중국 관헌의 과중한 세금 부과와 부역·재판의 불공평으로 부당한 탄압을 받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거류민회의 조직을 요청하였으나,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일본 외무성의 입장이 반영되어 거류민회 조직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1913년 안동에서 조선인 민회가 조직되었고 1915년 10월에는 백초구에서 조선인회가, 1916년 12월 훈춘에서는 훈춘 조선인 민회가 조직되면서 조선인 거류민회의 논의가 본격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 거류민회는 1917년 8월 용정 조선인 거류민회가 영사관 관령(館令)으로 북간도 18개 지역에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1929년 5월에는 조선인 거류민회 연합회로 체제를 개편하였다가 1937년 11월 오족 협화회(五族協和會)로 통합될 때까지 약 20여 년간 활동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조선인 거류민회는 “거류민 공동의 이익과 함께 공공의 사무를 심의·처리”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민적(民籍)에 관한 사항, 여론 조사, 미풍양속의 장려에 관한 사항, 교육·위생·식산·학예·종교에 관한 사항, 분쟁의 조정, 통신 연락에 관한 사항, 농촌 금융에 관한 사항, 기타 공익에 관한 사항” 등을 중요 사업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류민회장을 비롯한 간부진에 대한 임면권 및 재정 문제와 제반 의결 사항에 대한 결재권을 일본 영사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 거류민회는 조선 총독부 행정의 말단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현황

용정 조선인 거류민회의 경우 경성 시찰단 단장을 맡았던 이희덕(李熙悳)을 거류민회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일본 영사관은 1919년까지 두도구(頭道溝)·백초구(百草溝)·국자가(局子街)·팔도구(八道溝)·남양평(南陽坪)에서 거류민회 설립비와 보조비를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받고, 매월 조선 총독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조선인 거류민회의 설립 자금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경신 참변(庚申慘變) 이후에는 1922년 2월 전까지 연길현(延吉縣)에 용정촌(龍井村)·동불사(銅佛寺)·천보산(天寶山)·이도구(二道溝)·의란구(依蘭溝)·걸만동(傑滿洞)·국자가(局子街)·팔도구(八道溝)·알아하(嘎呀河)·두도구(頭道溝) 등 11개 처에, 왕청현(汪淸縣)에서는 양수천자(凉水泉子)·백초구(百草溝) 등 2곳에, 훈춘현(琿春縣)에서는 훈춘(琿春)·흑정자(黑頂子)·혼춘 두도구(琿春頭道溝) 등 3곳에, 화룡현(和龍縣)에는 남양평(南陽坪)·대납자(大拉子)·부동(釜洞) 등 3곳에 거류민회를 설립하였다.

특히 일제는 경신 참변 이후 재만 한인의 독립운동을 근절시키고 한인 사회의 통제 방법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경찰 분서와 거류민회 설립을 서두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강동진, 『일제의 조선 침략 정책사』(한길사, 1980)
  • 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한국 독립운동사 사전』독립 기념관, 2004
  • 김태국, 「북간도 지역 조선인 거류민회(1917∼1929)」(『역사 문제 연구』 4, 역사 문제 연구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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