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 농장

한자 白西 農莊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통화시 유하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민족 운동 단체
설립자 김동삼 등
설립 시기/일시 1915년
해체 시기/일시 1919년
정의

1915년 남만주에 있던 부민단과 신흥학교 졸업자들의 조직인 신흥 학우단이 독립 전쟁을 장기적, 안정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백두산 서쪽 봉천성 통화현에 만든 군영(軍營).

개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부민단의 민족 운동가들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도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였다. 이에 대비할 운동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민족 운동가들은 1915년 봉천성(奉天省) 통화현(通化縣) 제8구 관할 팔리초구 소북차(八里哨區小北岔)에 중국인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농장’이라 이름을 붙인 조직을 결성한 것이 백서 농장이다. 백서란 백두산의 서편에 있다는 뜻으로, 이곳의 군인들은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하면서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설립 목적

부민단신흥 학우단의 간부들은 신흥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단체를 결성하여, 중·일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독립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다고 보고, 이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군영인 백서 농장을 조직하였다.

변천

부민단과 신흥학교 간부들은 1914년 가을부터 신흥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수천 명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병영을 만들어갔다.

수많은 인력과 물자를 동원한 결과 소북차 일대의 나무를 벌목하고 1915년 장주실(莊主室)·훈독실(訓督室)·총무실·의무실·수품실(需品室)·농감실(農監室)·교도실·강당·중대장실·소대장실·치료실·식당·취사실·창고 등과 각 부대의 병사실 등으로 설치된 병영을 완성할 수 있었다. 병영에는 신흥학교의 제1회부터 제4회 졸업생 일부와 각 분교, 노동 강습소 등에서 교육받은 385명이 입영하였다.

농장의 장주(莊主)는 김동삼(金東三), 훈독(訓督)은 양규열(梁圭烈), 수품(需品)은 곽문(郭文), 총무는 김정제(金定濟), 경리는 김자순(金子淳), 의감(醫監)은 김환(金煥), 의무는 정선백(鄭善伯), 농감(農監)은 백광운(白狂雲), 교관은 허식(許湜)·강보형(姜保衡)·김동식(金東植)·김영윤(金永胤), 교도 대장은 이근호(李根浩), 제1중대장은 안상목(安相睦), 제2중대장은 박상훈(朴相勳), 제3중대장은 김경달(金敬達)이 맡았다.

그러나 백서 농장은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은 상태에서 물자가 부족하고 교통까지 불편하여 많은 군인이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따라 치료를 위해 떠나거나 그냥 농장을 나서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병영이 비게 되었다.

1919년 3·1 운동 후 한족회의 지시로 문을 닫았다. 백서 농장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한족회의 군사 조직인 서로 군정서로 편입되었다.

의의와 평가

백서 농장을 만들어 독립 전쟁을 장기적으로 준비하려는 구상은 그다지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끝까지 견지한 독립운동가들은 이후 서로 군정서 등에 합류하여 새로운 활동을 전개하는 민족 운동의 밑거름으로 성장하였다.

참고문헌
  • 원병상,「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독립군 전투사 자료집』 10, 1976)
  • 元秉常,『백서 농장사(白西農莊史)』
  • 서중석, 『신흥 무관 학교와 망명자들』(역사비평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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