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新興 武官 學校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통화시 유하현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군사 학교 |
|---|---|
| 설립자 | 한족회 |
| 설립 시기/일시 | 1919년 5월 |
| 해체 시기/일시 | 1920년 8월 |
| 최초 설립지 | 중국 길림성 유하현 |
| 현 소재지 | 중국 길림성 유하현 |
1919년 5월 서간도에 세워진 독립군 인재 육성 학교.
신흥 무관 학교는 독립군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양성하고자 설립되었다.
신흥 무관 학교는 1911년 4월 신민회 회원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을 비롯한 여섯 형제와 안동이상룡(李相龍) 등이 길림성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浦)의 추가가(鄒家街)에 설립한 자치 기관 경학사의 부설 기관 신흥 강습소에서 비롯되었다. '신흥'이란 '신민'의 ‘신(新)’과 다시 일어난다는 뜻의 ‘흥(興)’을 합친 말이다. ‘강습소’라고 한 것은 중국 정부의 주목과 탄압을 피하고자 ‘무관 학교’를 대신하여 사용하였다. 1911년 4월 변영태(卞榮泰)를 비롯해 40여 명의 제1기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그 뒤 1912년 4월 망명 지사들은 유하현 삼원포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벽지인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로 신흥 강습소를 이전하였다. 토지 구입에 필요한 경비는 이석영(李石榮)이 논밭을 매각한 돈으로 충당했다. 그해 1912년 7월 학생과 교직원이 힘을 합쳐 학교 교사를 새로 지은 후 신흥 중학교로 개칭하였다. 신흥 중학교는 군사반과 중학반을 두었다가, 나중에는 군사반만 운영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김경천(金擎天)·지청천(池靑天), 운남사관학교 출신 이범석(李範奭) 등이 신흥중학교 교관이 되면서 입학하려는 청년들이 날로 증가하였다. 이에 1919년 유하현 고산자(孤山子)로 신흥중학교를 이전하였는데, 통화현 합니하와 통화현 신화향(信禾鄕) 쾌대무자(快大茂子)의 분교에서도 군사 인재를 양성하였다.
신흥중학교가 유하현 고산자로 이전한 뒤, 1919년 5월 3일 임시로 빌린 양조장 건물에서 신흥 무관 학교로 이름을 바꿔 개교식을 거행하여 교세가 더욱 확장했다. 당시 신흥 무관 학교 교장은 이세영(李世永)이었다. 이세영은 대한제국군 출신으로 1913년 6월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모부 차장을 지냈다. 그 밑으로 부교장 양규열(梁圭烈), 학감 윤기섭(尹琦燮), 훈련감 이장녕, 교성대장(敎成隊長) 지청천(池靑天)·이범석, 교관 본교 졸업생 박두희(朴斗熙)·성준용·백종렬(白鍾烈)·오상세(吳祥世)·원병상(元秉常) 등이 군사 훈련을 담당했다. 신흥 무관 학교의 교육 과정은 하사관반 3개월, 특별 훈련반 1개월, 장교반 6개월 과정 등을 두었다. 이 후 신흥 무관 학교 졸업생들은 1919년 12월 북간도대한군정부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서로군정서[서간도의 군정부]는 몇 차례에 걸쳐 북로군정서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신흥 무관 학교의 설립 이후의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1919년 7월 합니하 분교 소속 학생 윤치국이 본교인 대두자 학생들을 구타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일 일어났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은 학생들의 단순한 사고였지만, 그 내막엔 당시 본교와 분교 간의 갈등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이에 중국 당국은 학교에 학무정지 조치를 내렸다. 또한 그해 7월 하순경에는 만주의 마적떼가 신흥 무관 학교를 급습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윤기섭 등이 마적에 납치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에 실망한 이시영(李始榮)은 봉천으로, 이동녕은 노령으로 가는 바람에 독립군 양성기관으로서의 명예가 실추하고 말았다.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신흥 무관 학교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중국 당국의 탄압이 심해졌다. 1920년 1월 일본의 사주를 받은 장작림 동북3성 군벌은 서간도 한인들의 자치 기구인 한족회(韓族會)의 해산을 명령했다. 특히 군벌은 그해 5월부터 일제와 합동수색대를 편성해 독립운동 근거지를 습격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살해하기 시작했다. 이를 피해 신흥 무관 학교는 1920년 7월경 안도현(安圖縣)으로 이동했지만, 끝내 그해 8월경, 설립 1년 3개월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신흥 무관 학교가 폐교된 직후 지청천(池靑天)은 사관생도 300명을 인솔하고 백두산 지역 안도현(安圖縣) 삼림지대로 들어가 홍범도(洪範圖)의 부대와 연합하였다. 김좌진부대의 뒤를 따라 밀산(密山)에 도착하여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참가하였다. 이후 신흥 무관 학교 출신들은 각지에서 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에 가담하였으며, 항일 단체를 만들어 활동을 지속하였다.
신흥 무관 학교는 대한 제국이 일제에게 강점당한 후 민족 운동에 가장 급선무로 필요했던 고급 인재를 양성하는 요람이었다. 특히 수많은 군사 간부를 육성함으로써 1919년 이후 민족 운동에서 활약하는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