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 양성소

한자 士官 養成所
분야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종교/신종교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군 양성 기관
설립자 서일|김좌진
개교 시기/일시 1920년 3월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0년 10월
정의

1920년 3월 길림성 왕청현(汪淸縣)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 기관.

교육 목표(교훈 포함)

1910~1920년대 북간도의 대표적 독립군단인 대한 군정서(大韓軍政署)는 민족 종교인 대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군단이었다. 사관 양성소는 대한 군정서가 일본군을 뛰어 넘는 군사적 능력을 갖춘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만든 무관 학교였다.

변천

사관 양성소는 북간도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위치하였다. 소장은 김좌진이었고, 교관은 이범석, 김규식, 김흥국, 최상운 등이었다.

사관 양성소에 입소한 훈련생은 서북간도에 이주한 한인 사회에서 18세에서 30세까지의 청년들이거나 국내에 들어간 파견원들의 권유에 의해 만주로 넘어온 청년들이었다. 이같이 모인 청년들은 6개월 만에 교육을 완수하는 과정을 통해 독립 정신을 고취시키는 정신 교육과 역사·군사학 및 병기 조작법·부대 지휘 운용법·체조·군사 훈련 등을 훈련받았다.

그런데 사관 양성소의 이 같은 독립군 양성 소식을 접한 일제는 중국 측에 이를 해체시키도록 압박을 가했다. 일제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던 중국군 맹부덕 보병 1단장은 군대를 이끌고 대한 군정서 사령부를 찾아갔다. 이에 사령관 김좌진은 맹 단장과 협상을 맺어 1개월 내에 독립군을 전부 삼림지역으로 옮겨갈 것을 약속하고 돌려보냈다.

1920년 9월 9일 사관 양성소의 제1회 졸업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298명의 제1기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나중소(羅仲昭)가 이끄는 대한 군정서 교성대에 들어갔다. 배출된 졸업생 전원을 본대에 배속시킨 대한 군정서는 중국 측과 약속대로 9월 17일 왕청현 근거지를 떠나 백두산 밀림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대한 군정서가 이동 중이던 그 해 10월 초 일제는 의도적인 훈춘 사건을 만들고, 이를 빌미로 대부대를 서북간도를 향해 침입시켰다. 사관 양성소 졸업생이 포함된 대한 군정서는 화룡현 청산리 지역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만나 독립군 연합 부대와 힘을 합해 10월 21일부터 10여 일 간 청산리 대첩을 치루었다. 그리고 백두산록으로 향하던 목적지를 바꿔 북만의 밀산을 거쳐 러시아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했다.

의의와 평가

북간도 대표적 독립군단이었던 대한 군정서의 독립군 정예병을 키우기 위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같이 체계적인 군사 교육을 받은 독립군들 이었기에 조국이 광복되기 까지 수 십년의 기간 동안 일제를 상대로 무장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신용하, 『한국 민족 독립운동사연』(을유 문화사, 1985).
  • 윤병석, 『독립 군사』(지식 산업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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