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明東 學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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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종교/신종교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명동촌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 설립된 민족 교육 기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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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자 | 김약연 |
| 인가 시기/일시 | 1908년 4월 |
| 개칭 시기/일시 | 1909년 |
1908년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 설립된 민족 교육 기관.
명동 학교는 북간도 최초의 근대 교육 기관이자 민족 학교로 1906년 이상설(李相卨)이 설립한 서전 서숙(瑞甸書塾)을 계승한 민족 학교로 알려져 있다. 이상설이 광무 황제의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되면서 그가 세운 서전 서숙이 문을 닫자 북간도 한인 사회에 서전 서숙을 계승할 학교가 필요함을 느낀 김약연(金躍淵)은 1908년 4월 화룡현 명동촌에 명동 서숙을 설립하였다. 이듬해 명동 학교로 이름을 고쳤다. 1910년에는 명동 중학교가 설립되었다. 1920년 10월 경신 참변을 일으킨 일제는 명동 학교를 항일 운동의 근원지라 하여 불태웠으나 1923년 한인들은 다시 재건하였다.이후 명동 학교는 일제 강점기 북간도 한인 사회의 애국 인재를 키우는 요람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초대 숙장은 박무림, 숙감은 김약연, 교사는 김학연·남위언·김하규·여준 등이었다. 1909년 명동 학교로 이름을 고친 후, 서울상동 청년 회관 출신의 정재면을 초빙해 근대 학문을 교수할 체제를 갖추어 가고 민족 교육을 확고히 시행하였다.
1910년에는 3년제의 명동 중학교를 추가로 설립하였다. 김약연이 교장에 선임되어 황의돈·장지영·김홍일과 같은 학문 수준이 높은 민족주의자들을 교사로 초빙해 교육의 질을 높여갔다. 학생들의 입학 자격은 특별한 조건 없이 15세부터 30세가 넘는 청장년까지 입학해 교육을 받았다.
명동 학교는 산수·생물과 같은 근대 교과목 이외에 민족 의식을 일깨워 줄 한국사·한국 지리·한국어 등에 중점을 두어 교육하여 모든 학생이 애국 인재로 성장하게 하였다. 따라서 명동 학교 출신들은 1919년 3·1 운동 당시 용정의 3·13 만세 시위를 주도하는 인물들이 되었다. 또한 많은 졸업생들이 서북간도의 독립 군단에 가담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때문에 1920년 경신 참변 시 일제는 명동 학교를 항일 운동의 근원지로 지목하여 교사를 불태우고 수많은 졸업생들을 체포하거나 학살하였다.
경신참변이 끝나자 북간도 한인 지도자들은 명동 학교를 재건해 1923년 복교시켰다. 초창기 한국 영화계의 큰 인물인 나운규, 민족 교육가 문성린, 민족 시인 윤동주, 청년 문사 송몽규, 통일 운동가 문익환 목사 등이 이 학교가 배출한 인물들이다. 1924년 북간도에 대흉년이 찾아와 학교의 운영이 어려워지자 중학교는 폐쇄되었고, 1925년 이래로 소학교가 남아 민족 학교로서의 전통을 이어갔다.
명동 학교는 한민족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애국 인재만 양성된다면 민족은 멸망하지 않고 다시 조국을 찾아 재건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