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昌東 學校 |
|---|---|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종교/기독교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국자가 와룡동 |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민족 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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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자 | 남성우·이병휘 등 |
| 개교 시기/일시 | 1907년 |
| 폐교 시기/일시 | 1930년대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5년 10월 |
1907년 길림성 연길현 국자가 와룡동(臥龍洞)에 설립된 민족주의 학교.
19세기 후반 일제의 침략과 국내 정치의 문란함을 견디지 못하고 망명한 한인들이 2세들의 교육을 위해 설립한 학교다.
길림성 연길현 국자가 와룡동에 설립된 민족 학교이다. 초등학교로부터 시작해 독립 전쟁을 수행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군사훈련 과정이 설치된 중학교가 증설되었다. 창동 학교의 학생들과 졸업생들은 1919년 3·13 용정 시위에 적극 참여했고, 많은 졸업생들이 독립군단에 입단해 독립군으로서 활약했다. 따라서 수없이 일제의 탄압을 받아 휴교를 반복해야만 했다. 결국 1930년대에 폐교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5년 10월 재개교하였다.
창동 학교는 19세기 후반 북간도로 이주한 한인 민족 운동가들인 남성우(南性祐)·이병휘(李炳徽) 등이 설립한 민족 학교이다. 이들 민족 운동가들은 국내에서 1905년 을사 늑약이 강압되어 조국의 주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자 후세들을 위한 민족 교육이 절실함을 느끼고 설립한 학교였다.
처음에는 초등학교 교육부터 시작했으나, 3년 후에는 중학교를 신설하고, 학교 이름을 창동 학원으로 고쳤다. 중학교를 개설하자 약 80명의 학생이 입학하였고, 1914년에는 140여 명으로 증원하였다.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였고, 경비는 학교 후원회에서 기부하였다.
창동 학교에서는 초등·중등부 모두 민족 의식과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는 민족 교육을 시켰다. 특히 중학부에서는 독립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군사훈련과를 설치해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따라서 이 학교의 학생들과 졸업생들은 1919년 3·13 용정 만세 시위 운동에 적극 참여해 조국의 독립을 외쳤다. 또한 많은 졸업생들이 독립군단에 입단해 독립군으로서 활약했다. 일제는 이러한 민족 교육의 요람에 수없이 탄압을 가해 창동 학교는 휴교를 반복해야만 했다. 1935년 일제가 학교를 점령하려하자 주민들은 학교를 불태우고 자진하여 폐교하였다.
1935년 9월 창동 학교의 교사들과 졸업생들에 대한 추모와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사은기념비(師恩記念碑)'가 창동 학교의 옛 자리 맞은 편 산언덕에 세워졌고,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창동 학교는 19세기 후반 망명한 한인들에 의해 설립된 학교이다. 이 시기는 조국이 일제에게 완전히 함몰되기 전이었다. 이들 이주 한인들은 강한 민족 의식을 갖고 있었고, 1905년 을사 늑약이 강제 체결되는 것을 보고 더욱 각성하여 이 민족 학교를 설립하였다. 따라서 이 창동 학교는 한민족 구성원의 조국 사랑을 뚜렷이 보여주는 학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