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撫松縣城 戰鬪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길림성 백산시 무송현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동북 항일 연군과 항일 의용군이 무송현 시가지를 기습한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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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인물/단체 | 김일성, 왕더타이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6년 8월 17일 |
| 종결 시기/일시 | 1936년 8월 18일 |
1936년 8월 17일 밤부터 18일에 걸쳐 동북 항일 연군과 마적 계통의 항일 의용군이 합세하여 중국길림성 무송현성을 기습한 전투.
1930년대 초·중반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 산하의 항일 유격대는 ‘반 민생단 사건’이란 시련을 겪으며, 내부의 갈등을 극복하였다. 또한 코민테른은 1935년의 제7차 대회에서 식민지 피압박 민족 민족 해방 운동의 지지와 식민지 및 종속국 인민의 해방을 결의했고, 반파시즘 통일 전선의 결성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1936년 5월 남만주에서 ‘재만 한인 조국 광복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재만 한인들의 자치와 한국 독립 지원 문제 등이 거론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 항일 연군 제2군은 조선과 가까운 백두산 일대의 무송, 장백현 일대로 진출하여 활발한 유격전을 벌였다. 중국길림성 무송현은 백두산 기슭 북방의 가장 큰 도시로서 일제 및 만주국 당국의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으며, 항일세력을 ‘토벌’하는 중요한 기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한인들이 대부분인 동북 항일 연군 제2군이 장백현 등 백두산 쪽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송현성을 공격하여 적의 힘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1936년 8월 하리(河里) 회의의 결정에 따라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 항일 연군 제1로군 제6사의 주력 부대는 무송현 일대로 진출하였다. 이후 일제 식민 통치 당국의 주요 거점인 무송현성을 공격하여 남만주 지역의 항일 유격 근거지를 개척코자 하였다. 동북 항일 연군 제1로군 제6사는 먼저 8월 16일 밤에 무송현성 서남쪽의 송수진(松樹鎭)을 공격하여 만주국군 소부대를 격멸하고 그곳을 점령하여 적의 주의를 끌었다. 제6사의 기습공격이 무송현성 전투의 서장이었다. 이후 중국인 왕더타이(王德泰)를 총지휘로 하는 제2군 부대는 제4사 2단과 제6사, 그리고 만순(萬順)·점산호(占山好)·문명군(文明軍) 등 마적 계통의 항일 의용군과 힘을 합쳐 총 1,800여 명의 병력으로 무송현성을 공격키로 하였다. 무송현성은 높이 5m의 성벽과 폭 10m의 해자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성벽 네 모퉁이와 성문 등에 모두 9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부근의 동산에도 포대가 설치되어 있는 강력한 군사 거점이었다. 17일 밤에 동북 항일 연군과 만순 등 항일 의용군은 무송현성을 포위하였다. 본격적인 공격은 18일 날이 샐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제6사의 주력인 7단과 8단은 소남문을 공격하고 만순 등 중국인 항일 부대는 동대문과 북대문을 공격하였다. 미리 짠 작전 계획대로라면 소남문 파출소 경관의 내응으로 문이 열려야 했지만, 그가 체포되어 문이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동대문과 북대문을 공격했던 만순 등의 항일 의용군은 적의 맹렬한 기관총 사격을 받고 퇴각하고 말았다. 이에 동북 항일 연군 부대는 성 밖의 동산 언덕에 올라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날이 새자 일본군 수비대는 성문을 열고 나와 항일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동북 항일 연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고 다수의 전사자를 내고 성내로 도주하고 말았다. 성안으로 철퇴한 일본군이 관동군 본부에 구원을 요청하여 비행기 2대, 그리고 주변에서 원군이 무송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 때에 동북 항일 연군 제2군은 이미 멀리 철수한 뒤였다.
동북 항일 연군 제2군 6사는 무송현성 전투 이후 만강(漫江)에 진출하여 지방 항일 홍보 활동을 진행하였다. 특히 만강의 화랍자촌(花拉子村)에서 연극 「피바다[血海]」를 공연하여 주민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