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청현 항일 유격대

한자 汪清縣 抗日 遊擊隊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항일 무장 투쟁 단체
설립자 김철·김명균
설립 시기/일시 1932년 3월
최초 설립지 중국 길림성 왕청현
정의

1932년 3월 중국 공산당 왕청현 위원회 산하에 창건된 항일 무장 투쟁 단체.

개설

1931년 9월 18일 일본군이 ‘만주 사변’을 도발하여 중국 동북 지방을 침략하자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회는 10월 12일에 만주성 위원회에 항일 유격대의 창건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만주 각지에서 1932년 봄부터 항일 유격대가 창설되었다. 중국 공산당 왕청현 위원회에서는 1932년 초 회의를 열고 군사부장 김명균(金明均)에게 유격대를 건립할 임무를 맡겼다. 김명균은 1932년 2월 초에 왕청현 당 위원회 연석회의를 열고 적의 무장을 빼앗아 유격대의 무장을 강화하기로 했다. 1932년 2월 20일 김철을 대장으로 한 몇 명의 대원들은 유격대 건립을 위해 대감자(大坎子)의 공안 분주소를 불의에 습격하여 경찰의 무장을 해제하고 소총 7자루를 탈취하였다. 또 석현(石峴) 장동에서 중국인 자위단을 매복 습격하여 역시 소총 3자루를 노획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32년 3월 소왕청(小汪淸) 춘명향(春明鄕) 중경리(中慶里)최창호의 물 방앗간에 모인 왕청의 열혈 청년들은 ‘왕청현 노농 반일 유격대’[약칭 왕청현 유격대]의 창건을 선언하였다. 이 때 유격대 대장은 김철, 정치 위원은 김명균이 맡았는데, 대원은 양성룡(梁成龍)·이응만·이원섭 등 10여 명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또 이광(李光) 등 9명을 중국 항일 의용군인 길림 구국군(吉林救國軍)에 파견하여 통일 전선을 강화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구국군의 오의성(吳義成)은 이들을 별동대로 편성하고 이광을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유격대는 소왕청 뒷 골짜기의 사시나무 숲속에 귀틀집을 짓고 유격대 본부를 설치하였다. 왕청현 유격대는 소왕청 일대 주민들의 자발적 협력과 성원으로 급격히 발전하였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무기와 식량을 지원하였으며, 남편과 자식들을 유격대에 보냈다. 그리하여 유격대는 1932년 9월 경까지 18차의 전투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괴뢰 만주국군이나 관헌, 일본군을 기습하여 다량의 총과 탄약, 군수품을 노획하거나, 지주나 친일파의 집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응징하는 활동을 전개하여 민중의 호응을 받았다.

1932년 11월에 왕청현 유격대는 안도현(安圖縣)에서 온 별동대[대장 이광(李光)], 영안현(寧安縣)에서 온 유격대와 연합하여 ‘왕청현 유격대대’를 편성하였는데, 대원은 모두 90명이었다. 당시 이들은 80여 자루의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하였다. 대대 아래 3개 중대를 두었다. 제1중대장은 최용빈, 2중대장은 안기호, 3중대장은 김상준이 임명되어 각자 담당 구역에서 활동하였다. 왕청현 유격대대의 초대 대대장은 양성룡(梁成龍)이 맡았다. 1933년 10월부터 1934년 3월까지 2대 대대장은 조춘학이 맡았다. 초대 정치 위원은 김명균이었는데 이후 조춘학, 남창익 등이 맡았다. 1933년 초 안도현(安圖縣)에서 김일성이 거느린 항일 유격대가 와서 왕청현 유격대대에 합병되었다.

왕청현 항일 유격대는 창건 초기에는 소비에트 설립과 홍군(紅軍) 건설이라는 좌경 노선으로 출발하였으나, 1933년 ‘1월 서한’ 등의 방침에 따라 인민 정권 수립과 인민 혁명군 건설 방침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933년 4월 17일부터 19일까지 일본군은 괴뢰 만주국군과 경찰·자위단 등을 규합하여 1,500여 명의 대병력으로 소왕청(小汪淸) 항일 유격 근거지를 세 방면에서 공격해 왔다. 왕청현 유격대대는 이같은 대규모 포위 공격을 세차례나 격퇴한 소왕청 근거지 보위전 등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역량을 강화하였다. 당시 소왕청 항일 유격 근거지는 중국 공산당 동만 특별 위원회와 왕청현 위원회가 있던 중국 공산당동만 조직의 핵심이 위치하고 있던 요충지였다. 따라서 이 근거지를 잘 지켜냄으로써 후일의 항일 투쟁 및 중국 공산당의 역량 강화에 기여하였다.

설립 목적

1930년대 초 중국길림성 왕청현 일대에서 항일 투쟁 및 반봉건·계급 투쟁을 실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1932년 11월 왕청현 유격대대로 개편되었다가 1934년 3월 왕청현 유격대대는 다시 동북 인민 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3단으로 개편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왕청현 항일 유격대의 임무는 성립 초기에는 자신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무장 강화와 대원모집 등의 활동이 중심이 되었으나, 차츰 실력이 갖추어 지자 왕청현 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항일 무장 투쟁과 친일파 처단, 지주 습격 등 반봉건 및 계급 투쟁에 주력하게 되었다. 아울러 주민들을 괴롭히는 토비(土匪)의 무장을 해제하고 일본 간첩 10여 명을 처단하기도 했다. 한편 1932년 11월 2일 왕청현 소왕청(小汪淸) 지방에 소왕청 소비에트[지방 소비에트 2곳, 촌 소비에트 2곳, 소속 군중 800여 명]가 성립하자 이를 보위하는 것이 주요 임무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1933년 4월 17일부터 19일까지 소왕청 유격 근거지에 대한 일·만 연합세력의 세차례의 대규모 공격을 방어한 ‘소왕청 보위전’을 들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왕청현 항일 유격대는 연길·화룡·훈춘현 유격대와 함께 대부분이 한인(韓人)으로 구성되었다. 1930년대 초 동만(東滿) 지역 항일 무장 투쟁의 중심을 이루었다. 1934년 봄 동북 인민 혁명군 제2군, 나아가 1936년 동북 항일 연군 제2군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만주[중국 동북 지역]에서 중국 공산당 주도 항일 무장 투쟁 세력의 주류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준엽·김창순,『한국공산 주의 운동사』5(청계연구소, 1986)
  • 中共延邊州委조직부·중공연변주위 黨史연구실·연변조선족자치주당안관 편,『중국 공산당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직사』, 연길 : 연변인민출판사, 1991.
  • 양소전·차철구·김춘선·김철수·안화춘(김춘선 등 역),『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 2009)
  • 中共延邊州委 黨史工作委員會·黨史硏究所 編, 「中共汪淸縣委」(『延邊歷史事件黨史人物錄』, 내부자료, 1988)
  • 최상철·문호갑,「왕청 유격대의 전투공훈」·「소왕청보위전」(『봉화』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3, 북경, 민족출판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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