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부 통일 회의

한자 三府 統一 會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조약과 회담
지역 길림성 길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민족주의운동 단체 통합을 모색한 회의
관련인물/단체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체결|제정 시기/일시 1928년 9월
정의

1928년 길림성 길림에서 민족주의 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모색하기 위해 열린 회의.

개설

만주의 민족 운동가들은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의 이념 차이를 불문하고 항일에 동조하는 모든 세력을 하나로 망라하여 민족 유일당을 조직하려 하였다. 1927년부터 논의를 시작하였지만, 1928년 5월 ‘전 민족 유일당 조직 촉성 회의’를 계기로 실패하였다. 이에 민족주의 운동 단체인 참의부·정의부·신민부 관계자들이 1928년 9월 길림에서 만나 통합을 논의하였다.

하지만 민족 유일당을 둘러싼 논의 과정에서 3부가 각각 내부 분화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논의는 긍정적인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그 결과 민족주의 운동 단체는 국민부혁신 의회로 나뉘어졌다.

경위 및 목적

재만 조선인의 항일 역량을 하나로 묶어 내려는 움직임은 1920년대 중반에도 있었다. 1924년 중국에서 제1차 국공 합작이 체결되고, 이를 바탕으로 장개석이 지휘하는 국민 혁명군이 1926년 북벌을 개시하면서 민족 운동 세력이 크게 자극 받은 것이다.

반군벌, 반제국주의를 표방한 북벌이 만주에서까지 진행되면 국민 혁명군과 친일적인 장작림 군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판단하고, 민족 운동 세력은 국민 혁명군 편에 서서 반일 전쟁의 일환으로 북벌에 참가하고, 여기에서 승리하면 독립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민족 운동가들은 북벌에 호응하며 항일 운동을 지도할 수 있는 해외 지역 민족 운동의 지휘부로서 민족 유일당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1927년 4월 시사 연구회를 조직하여 만주의 각 민족 운동 단체의 여론을 모으고 회의를 준비하였다.

그 결과 1928년 5월 ‘전 민족 유일당 조직 촉성 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촉성회파와 협의회파로 분열하여 각자 민족 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 조직을 결성하였다. 때마침 북벌을 하고 있던 국민 혁명군은 북경을 점령하고, 장작림 군벌을 만주로 쫓아냈는데, 장개석은 북벌의 종료를 선언하였다. 민족 유일당을 결성하기 위한 활동이 오히려 단체들의 분열을 가속화시킨 데다, 추진하는 동력 또한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민족주의 운동 단체만이라도 합동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28년 9월 길림에서 정의부의 주도로 모인 3부의 주요 지도자들은 통합을 모색했지만 의견을 모을 수 없었다. 3부를 완전히 해체하고 만주 지역의 민족 유일당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는 데 합의하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3부가 각각 분열되어 있는 상태였다. 정의부는 다수파와 소수파로, 신민부는 민정파와 군정파로, 참의부는 김소하파와 김승학파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의견을 하나로 모을 수가 없었다.

결과

1928년 11월 3부의 대표들은 통합 회의가 결렬되었음을 각 단체에 통고하고 논의를 중지하였다. 민족주의 운동 단체만의 통합에 실패함에 따라 북만주에는 혁신 의회가 결성되었고, 남만주에는 국민부가 각각 결성되었다.

참고문헌
  •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 운동사(1920~1945) : 민족주의 운동 및 사회주의운동 계열의 대립과 연대를 중심으로』(아세아 문화사, 1999)
  • 채영국, 『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 항일무장 투쟁』(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