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독립 군비단

한자 大韓 獨立 軍備團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백산시 장백조선족자치현 팔도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 단체
설립자 이희삼
설립 시기/일시 1919년 5월
해체 시기/일시 1921년 6월 1일
최초 설립지 중국 길림성 장백현 팔도구
정의

1919년 5월 경 중국길림성 장백현 팔도구(八道溝)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개설

대한 독립 군비단은 3·1 운동 직후인 1919년 5월 경 중국길림성 장백현에서 이희삼(李熙三)·이영식(李永植)·이병호(李炳浩) 등이 조직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이동휘(李東輝) 등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군비단은 약장(約章) 제1장 종지(宗旨)에서 “본단은 우리 임시 정부 국무 총리 각하의 명령으로 조직한다”라고 명시하여 처음부터 임시 정부 산하의 군사 기관임을 자임하였다. 그리하여 본부(총단)는 팔도구 독암리(獨岩里)에 두고, 통신 사무국은 16도구 신창동(新昌洞)에 두었다. 1921년 6월 조직 상황을 보면 제1~3구지단(支團)과 그 산하 지단 지부(支部)를 둔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제1구 지단 지부의 단원은 180여 명이나 되었다. 장백현은 백두산 서남부의 산기슭에 위치하고 압록강 상류를 끼고 있어 지형이 험준하고 교통이 불편하지만, 남으로는 함경남도의 혜산진과 마주하고 있어 국내와 교섭이 잦았다. 이곳은 쉽게 강을 건널 수 있어 1910년 ‘경술 국치’ 이후 한인 이주자가 급증하면서 독립군 근거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20년 후반기에 국내의 북청과 단천 등에 국내지단이 결성되어 본부와 밀접히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대한 독립 군비단 활동의 특징은 항일 무장 투쟁에 있었다. 창립 당시 산하 무장 부대(독립군)의 직제를 보면 총단장 이희삼, 중대장 이영식, 참모장 이병호, 제1 소대장 고인식(高仁植), 제2 소대장 김낙걸(金洛杰), 제3 소대장 안용도(安瑢道)였다. 1개 소대가 28명으로 구성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대한 독립 군비단 산하의 무장대원은 약 100여 명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1년 7월 중대원 28명이 국내의 평안북도 후창·강계 일대와 함경남도 장진·홍원·북청군 일대로 진입하여 매우 주목되는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군비단은 소규모 부대로 국내로 진격하여 일제 군경의 초소나 파출소를 습격하거나 독립운동 선전과 군자금 모집, 친일파 응징 활동을 전개한 뒤 다시 압록강을 건너 본대로 돌아오는 게릴라식 전법, 즉 유격전을 전개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920년 전후 시기 남만주(南滿洲)지역의 여러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표방한 독립운동 방략은 거의 대부분 무장 투쟁이었다. 대한 독립 군비단 역시 설립 초기부터 강력한 무장 투쟁을 통한 일제 군경 수비대나 파출소·주재소의 습격, 군자금 모금 활동에 전념하였다. 특히 1919년 9월 12일 책임자 대회를 통해 군자금 모금 문제를 구체화하였다. 1921년 3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크고 작은 전투를 무려 10여 차례나 수행하였다.

대한 독립 군비단은 장백현 및 한국 북부 국경 지대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금과 항일 무장 투쟁, 그리고 독립운동에 활약할 인력 충원에 중점을 두었는데, 군비단의 활동은 1922년 경에 이르러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즉 중국 남부의 상해(上海)에서 활동하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중국 동북(만주)에서 활동하던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여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추진코자 하였다. 이에 따라 군비단은 부근의 다른 독립운동 조직과 통합을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1921년 6월 1일 군비단 통신 사무국이 있는 장백현 16도구 신창동에서 군비단, 광정단(光正團), 흥업단(興業團)의 주요 임원 20여 명이 모여서 통합을 위한 독립군 연합회를 개최하였는데, 흥업단 지단장 김창일(金昌一)을 임시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군비단은 대한 국민단을 거쳐 광정단으로 자연스럽게 해소 발전하였다.

설립 목적

중국길림성 장백현 일대 거주 한인 교민들을 바탕으로 항일 무장 투쟁 등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 일제 식민지 통치를 타도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설립하였다.

변천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바라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시로 1922년 2월 흥업단과 합쳐져 대한 국민단(大韓國民團)으로 발전하였다[1921년 10월이라는 설도 있다]. 대한 독립 군비단은 조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한 국민단을 거쳐 광정단으로 거듭났으며, 지역적 한계를 인식하고 일부 대원들을 북상시켜 러시아연해주 지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기도 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한 독립 군비단 산하 무장대는 1921년 7월 6일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후창군 읍내를 통과하면서 각지에서 일본 경찰과 충돌하였다. 같은 달 8일에는 후창군 신백리(神白里)에서, 15일에는 함경남도 장진군 수하면 양생리(陽生里)에서, 18일에는 장진군 본면 입암리(立岩里)에서 일경과 교전했는데, 이후 대규모 전투가 불리함을 알고 3개 소대로 편성하여 새로운 작전을 전개하였다. 즉 7월 21일에 박영식(朴永植) 소대는 장진군 동면 대통구(大通口)에서, 22일에 안용도 소대는 함남 홍원군 희현면 숲속에서 경찰과 교전하였는데, 안용도 소대는 25일에 희현면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 3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또 같은 25일 고인식 소대는 평북 강계군 아득애령(我得愛嶺)에서 일본 경찰대와 큰 접전을 벌였고, 8월 1일 함남 남부의 북청군까지 진출한 안용도 소대는 하차면(下車面)에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또 대한민국 임시 정부 기록에 따르면 1921년 9월 16일에 제1중대 3소대 1분대장 김병묵(金秉默) 등 10명은 장백현의 본영을 떠나 23일 밤 11시 경에 함남 갑산군 동인면 함정포(含井浦)의 일경 주재소를 습격하여 폭파하고 경찰을 사살한 다음, 다수의 무기와 탄약, 현금 등을 빼앗고 무사히 귀대하여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겼다. 특히 함정포주재소 전투에서 참교(參校)김형길(金亨吉)과 김병수(金炳洙)는 순사부장 고바야시(小林淸治)를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으며, 군비단 독립군 부대는 주재소를 불태운 뒤 부근의 영림창도 공격하여 전소시키는 등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파괴하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어 국내외를 놀라게 하였다. 또 같은 해 11월 6일 소대장 김성연(金成淵) 이하 26명은 함남 삼수군 호인면 운전리(雲田里) 주재소를 습격하고 교전 1시간 여 만에 순사 3명을 사살하고 주재소를 폭파한 다음 무사히 본영에 돌아오기도 하였다.

한편 군비단의 제2지단장이었던 송병걸은 장백현 17도구에서 북쪽으로 5㎞가량 떨어진 삼포동(三浦洞)에 거주하였는데, 그곳에서 수류탄까지 제조하여 항일 투쟁의 도구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1921년 봄에는 군사부장 김찬과 부원 박춘근(朴春根) 등의 지휘 하에 일부 무장 대원들이 북만주의 돈화(敦化)와 밀산(密山) 등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의 이만으로 북상, ‘고려혁명의용군’에 편성되었다. 이들은 1923년 봄까지 소련 적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러시아 혁명에 반대하는 백파군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1920~1922년 동안 연해주는 러시아 혁명을 주도하는 적군(赤軍)과 이에 반대하는 백군(白軍)파의 내전이 한창이었는데, 한인들은 러시아 혁명의 기세에 편승하여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적군측에 가담하여 항일투쟁과 백군파와의 항전에 가담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한 독립 군비단은 장백현 일대 한인 교민들을 기반으로 1920년대 초반 주로 항일 무장 투쟁 수행을 통해 한국 북부 국경 지대의 치안을 교란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군비단은 대한 국민단광정단으로 통합되었는데, 남만주 지역 통합 독립군단 및 교민 자치조직으로 1924년 건립되는 참의부(參議府)의 모체가 된 독립운동 조직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대한민국 공보처, 194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5(1973)
  • 김승학, 『한국독립사』(독립문화사, 1965)
  • 김준엽·김창순,『한국공산 주의 운동사』4(청계연구소, 1986)
  • 채영국, 『한민족의 만주 독립운동과 정의부』(국학자료원, 2000)
  • 윤대원, 『상해시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 연구』(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 허영길,「장백의 ‘대한군비단’」(『불씨』,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2, 북경 : 민족출판사, 1995)
  • 김주용,「중국 장백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활동과 성격」(『사학연구』92호, 한국사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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