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 한인 청년 동맹회

한자 南滿 韓人 青年 同盟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청년 단체
설립 시기/일시 1929년 2월 17일
해체 시기/일시 1930년 3월
최초 설립지 길림성 남만주
정의

1929년 2월 17일 남만주에서 10개의 한인 청년 단체들이 통합해 결성한 청년 단체.

개설

남만 한인 청년 동맹회은 남만주에서 10개의 한인 청년 단체가 통합해 결성된 단체이다. 좌경적 경향을 갖고 있어 국민부 지도부의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사회주의 경향을 포기하지 않고 활동을 벌이다가 1930년 3월 해체되었다.

설립 목적

남만 한인 청년 동맹회는 남만주의 대표적 한국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의 주도하에 10개의 한인 청년 단체들이 통합하여 1929년 2월 결성한 단체이다. 남만 한인 청년 동맹회는 노동자들의 동맹 파업과 농민들의 소작 쟁의를 지원하고, 항일 무장 투쟁을 수행하며, 중국 측과 함께 일제의 만주와 몽골 침략을 저지시킨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1929년 2월 남만 한인 청년 동맹회 결성 당시에는 만주 지역 민족 유일당 운동에 동참한 사회주의 계열의 화요회나 재건설 그룹의 회원들도 참가하였다. 이에 남만 한인 청년 동맹회는 좌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남만의 통합군 정부로 성립된 국민부의 지도부는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1929년 10월 최봉(崔峰)을 비롯한 6명을 피습했다. 하지만 좌익 인사들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그 뒤 남만 한인 청년 동맹회는 내부를 정비하기 뒤해 1929년 11월 2일부터 3일간 수습 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에서 남만 한인 청년 동맹회는 이진탁(李辰卓)·고이허(高而虛)·이종락(李鐘洛) 등 21명의 중앙 집행위원을 선출하고 이들로 하여금 조직을 이끌도록 하였다. 그런데 대회에서 남만 한인 청년 동맹회국민부의 방침과는 달리 노동자·농민 소비에트를 건설하고, 중국 봉건 군벌을 타도한다는 방침을 채택하여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하였다.

이에 국민부는 1929년 11월 20일 중앙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고이허를 위원장으로 남만 한인 청년 동맹회를 개편하고, 남만의 각 지방에 특파원을 파견해 지방 조직을 정비하도록 하면서 좌익 노선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국민부 지도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만 한인 청년 동맹회는 청년층의 주도하에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해 나갔다. 국민부는 자신들의 지도 방침과는 다른 방향으로 내닫자, 1930년 3월 남만 한인 청년 동맹회를 해체시켰다.

의의와 평가

사회주의 경향의 남만 한인 청년 동맹회는 약소 계급인 노동자·농민을 지지하고 중국 군벌과 일제를 타도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식민지 한국의 백성 중 가장 많은 비율을 가진 노동자·농민의 힘을 키워야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 주의 운동사』4 (청계연구소, 1986)
  •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1945)』(아세아문화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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