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정단

한자 光正團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백산시 장백조선족자치현 17도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 단체
설립자 김호익(金虎翼), 윤덕보(尹德甫)
설립 시기/일시 1922년 4월
해체 시기/일시 1924년 11월
정의

1922년 4월부터 1924년 11월 경까지 중국길림성 장백·무송현 일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단체.

개설

광정단의 초기 주요 임원은 윤덕보(尹德甫)·한운섭(韓雲燮)·강우건(姜宇鍵)·이태걸(李泰杰)·이병률(李秉律)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대한 독립 군비단에서 활동한 사람들이었다.

광정단대한 독립 군비단의 조직을 그대로 승계하였기 때문에 활동 또한 군비단과 비슷했다. 광정단은 먼저 국내 진입 계획을 세워 식민지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실상을 널리 선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한 군자금 모집도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또한 광정단무송현(撫松縣) 등에 학교 설립도 추진하였는데 백산 무관 학교가 대표적 사례이다.

설립 목적

광정단의 정식 명칭은 대한 독립 광정단(大韓獨立光正團)이다. 본부는 대한 독립 군비단이 있었던 장백현 17도구에 있었다. 1910년 경술 국치 이후 장백현으로 한인 이주자가 급증하면서 독립군 근거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22년 4월 15일 모두 11장 30조에 달하는 광정단 단칙이 발표되었다. 단칙 제2장에 나와 있는 ‘주의(主義)’에 따르면 광정단은 “정의를 표방하고 인도를 발휘하여 민족성 계발과 적개심을 양성하는 주의”이며, “철혈(鐵血)정신으로 국가 독립의 완전한 성취를 위해 분투 노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이를 보면 광정단은 반일 투쟁과 독립 쟁취를 목적으로 하는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 조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변천

광정단대한 국민단·대진단(大震團)·태극단과 광복단의 일부가 통합되어 1922년 4월 중국길림성 장백현(長白縣)에서 발족하였다. 광정단으로 통합된 독립군단 가운데 주류를 형성한 단체는 대한 국민단이었다. 대한 국민단광정단으로 통합되기 직전 대한 독립 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흥업단(興業團)이 통합되어 성립한 단체였다. 따라서 광정단은 엄밀히 말하면 장백현 일대에서 활동하던 군비단·흥업단·대진단·태극단과 광복단의 일부 등 5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조직이었다.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광정단(匡正團)’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름 자체가 지금까지의 모든 과오를 바로잡고 새롭고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종전의 기성 단체들을 모두 해산하고 새롭게 통합하여 바른 길로 나아가자는 결연한 의지가 담긴 것이었다.

광정단은 ‘주의’와 설립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 조직을 설치하였다. 중앙 조직인 총부(總部)에는 단장과 부단장 각 1인과 시찰(視察) 4인, 총무 1인, 회계검사 2인을 두었으며, 그 밑에 의사부(議事部)·재무부·경호부·군사부·서무부·문화부·권업부(勸業部) 등 7개 부서를 두고, 이들 부서에는 부장과 차장 각 1인씩을 임명하였다.

지방 조직의 경우 규모에 따라 부(部)·서(署)·구(區)로 나누고, 부에는 부장과 부부장, 총무, 서기, 재무장 등을 각 1인씩 두고 경호장(警護長) 1인과 경시(警視) 2인을 두도록 하였다. 서에는 서장(署長)과 총무, 서기, 재무, 경시 각 1인과 문화원(文化員)·권업원(勸業員)을 1인씩 두었다. 구에는 구장과 경시 각 1인씩을 임명하고, 오장(伍長)과 문화원·권업원 몇명을 두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직 체계를 볼 때, 광정단은 재만 한인들을 기반으로 항일 무장 투쟁을 수행하는 한편, 교민들의 문화 향상과 교육, 식산 흥업을 주요 사업으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된다.

중앙과 지방의 조직 체계를 세운 광정단은 총부를 장백현 17도구 동평덕리(東坪德里)에 두고 지방 조직 중 부(部)에 해당하는 기관은 임강현에 서부(西部)를, 무송현에 북부를 설치하였으며, 장백현에 있는 총부는 지방 조직 남부의 임무를 겸하도록 하였다.

창립 초기 간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총무부 : 김호[일명 김호익]·윤덕보·한운섭

의사부 : 김용대·윤세복·석기만

재무부 : 강건·김국태·김여진

군사부 : 강진건·정철호·최진용·김재풍

경호부 : 이한평·신덕선·최진용

문화부 : 김연생·이재연·강명화

서무부 : 이병율·김화성·김병국

통신부 : 최진용·이종규·최광수

위생부 : 김진열·김경무

외교부 : 서경태·김정부·최순소·조덕목

장백현을 주 무대로 활동하던 광정단압록강을 건너 활발한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하였다. 때문에 일본 당국은 이러한 사실을 중국 당국에 알리고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적극 탄압하도록 요청하여, 1923년 이후 광정단 대원들의 무장 투쟁이 차츰 약화되었다. 실제로 일본 측의 요구를 수용한 중국 동북 군벌 정권 당국은 무장 독립군 및 배일 한인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예를 들어 군사부원 정철호는 지방 조직을 순회하던 중 중국 순경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사로잡혀 일본 경찰에 인계되었다. 또 군사부장 강진건(姜鎭乾) 역시 중국 군경대에 검거되어 일제 측에 넘겨졌고, 조선 총독부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고초를 겪어야 했다. 나아가 1925년 6월 조선 총독부 경무국과 중국 동북 군벌 정권은 미쓰야 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하고 조직적으로 만주 지역 한인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광정단은 1924년 초부터 조직의 체제를 위원제로 바꾸고 장백현 일대 한인 교민들을 대상으로 자치활동에 주력하다가 통의부 등 다른 단체들과 함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정의부(正義府)로 통합되었다. 1924년 11월 남만주 각 민족 운동 단체 대표자들이 길림에서 단체 통합을 결의하고 정의부를 결성하자 이에 합류되면서 해체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광정단의 창립 초기 간부진을 보면 단장 김호익(金虎翼), 총무 윤덕보(尹德甫)[일명 병용(秉庸)], 군무장(軍務長) 강진건(姜鎭乾), 재무장 김관용(金寬用), 비서장 장승언(張承彦) 등이었다. 그 뒤 1923년 6월 조직 개편을 단행하여 단장에 윤덕보, 부단장에 김호익, 총무에 석계(石桂), 비서에 김성진(金聲振), 재무부장에 김국태(金國泰), 서무부장에 장승언(張承彦), 경호부장에 정철명(鄭哲明), 군사부장에 이한평(李漢平), 군법과장에 김용대(金容大), 문화부장에 한성일(韓性一), 산업부장에 최진용(崔鎭鏞) 등이 임명되었다.

윤덕보는 군비단 단장 시 국내 진입 작전을 중시하였다. 그가 단장이 된 것은 국내 진입 작전을 강력히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먼저 안도현(安圖縣) 산중에 군영을 설치하고, 다수의 한인 청년을 모집하여 2개월간의 군사 훈련을 시키고 장백·안도·무송·임강 등 백두산 부근의 각 현에 배치하였다. 또 장백현 14도구 북방자(北房子)에 재봉소를 설치하여, 군복 등 군수품의 자급자족을 도모하였다. 한편 기금을 모아 무송현 부근의 동차구(東岔口)대진동(大鎭洞)에 백산 무관 학교(白山武官學校) 설립을 시도하였다.

광정단은 1923년과 1924년에 소속 독립군을 국내에 진입시켜 일본 식민 통치 기관의 파괴, 친일파 숙청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무기 구입·군대 양성 등의 활동도 적극 전개하였다. 1924년 10월에 독립군을 3개 대로 편성하여, 제1대는 나성(羅性)이 150명을, 제2대는 김백(金伯)이 3백 명을, 제3대는 남익(南翼)이 50명을 지휘하였다. 김호익·윤세복(尹世復) 등은 중국 동북 정권과 정치적 교섭을 벌였으며, 김용대는 무기 구입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광정단압록강 접경 및 주변 지역인 장백·무송·임강현 등지를 기반으로 한인들이 밀집한 주요 지역에 중앙 및 지방 조직을 설치하고 대한 독립 군비단 이후 축적해온 역량을 바탕으로 적극적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광정단 부단장을 지낸 강우건의 수기에 따르면, 광정단백두산 부근 및 압록강 상류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 군경이나 독립군을 탄압하는 중국 군경을 상대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특히 국내에서는 적게는 3~4명에서 1개 소대까지의 병력이 모연대(募捐隊) 또는 유격대를 결성하여 평안북도 초산, 함경남도 혜산진·삼수·갑산 등으로 진입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고 일본 군경의 초소나 파출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 예로 1922년 6월 15일 김병수·한성조·정태성 등 단원 3명은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하여 압록강 상류를 건너 함경남도 내륙의 갑산군으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갑산의 부호 김의봉 집에 머물고 있던 일본 경찰 4명을 사살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광정단은 총부 직속으로 암살대와 성위대(誠威隊)를 운영하여 특수 임무를 담당케 하였다. 원문화(元文化)를 단장으로 하는 암살대는 임강현에 본부를 두었는데, 주로 관할구역 안의 일제 침략 기구와 친일분자들을 파괴, 처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장백현 16도구 덕수리(德水里)에 본부를 둔 성위대는 대장 강승경(姜承京)의 지휘로 국내 진입 작전에서 결사대의 역할을 수행하는 정예의 소규모 특수 부대였다.

광정단의 국내 진입 작전은 항일 무장 투쟁에 그치지 않고, 일제의 통치 기구나 경제 수탈 기구를 파괴하고 친일 세력을 위협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강승경[군사부장 겸임]이 이끄는 38명의 광정단 대원들은 1922년 9월 25일 본부 소재지인 동평덕리를 출발하여 함남 삼수군 호인면의 영성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 마쓰이 등 9명을 사살하고 총기와 군수품 등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또 1923년 7월 28일 광정단의 무장대원 28명은 함경남도 갑산군 보혜면으로 진출하여 일경의 포태산 주재소를 기습 공격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였다.

1923~1924년 사이에 광정단은 성위대를 수십 번 조선 국내로 파견하여 일제 침략 및 경제수탈 기구를 파괴하고 친일분자를 소탕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백두산압록강 상류, 함경남도 북부 일대에서 주목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광정단대한 독립 군비단대한 국민단의 인적 자원을 계승하여 한층 발전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광정단의 해소와 새로운 단체 정의부로의 통합은 각 단체 및 구성원들의 이념과 행동 방략을 통합, 조화시키려는 독립운동가들의 결실의 상징이었다.

광정단은 결국 1924년 11월 정의부로 통합되어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920년대 중후반 남만주 독립운동과 교민 자치 운동을 주도한 정의부의 모태 조직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 김승학,『한국독립사』, 독립문화사(196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5(1973)
  • 채근식,『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 공보처(1949)
  • 채영국, 『한민족의 만주 독립운동과 정의부』(국학자료원, 2000)
  • 허영길, 「광정단」및 리휘, 「광정단은 함정포 경찰주재소를 요절냈다」, 『불씨』(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2), 북경 : 민족출판사, 1995)
  • 김주용,「중국 장백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활동과 성격」(『사학연구』92, 한국사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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