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혁명당

한자 高麗 革命黨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길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항일 독립운동 단체
설립자 이동락, 정이형, 장지필 등
설립 시기/일시 1926년 4월 5일
해체 시기/일시 1927년
최초 설립지 길림성 길림
정의

1926년 4월 5일 중국길림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

개설

고려 혁명당은 재만 및 재러 독립운동계와 천도교·형평사 계통의 인사들이 설립하여 항일 무장 활동을 활동 목표로 하였다. 고려 혁명당은 설립 후 남만주 지역에 11개의 세포 조직을 만들어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항일 독립 전쟁을 수행했다. 중심 당원들이 1927년 이후 만주에서 전개된 민족 유일당 운동에 가담하면서 해체되었다.

설립 목적

재만 독립운동 기관인 정의부천도교·형평사·재러 독립운동계의 주요 인물들인 양기탁·최동희·오동진·정이형·고할신·이일심·주진수·김광희·이규풍·현정경·현익철·곽종육·이성계·이동구·김봉국·이동락 등은 1925년 초부터 약 1년간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준비했다. 이들은 국내의 천도교 연합회 본부와 형평사, 사회주의 계열의 단체들과 연락을 취해 하나의 단체로 통합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국내의 사회주의 계열은 중도에 참여를 포기했고, 천도교 및 형평사 계통의 인사들과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하던 인사들이 참여하여 1926년 4월 고려 혁명당을 성립시켰다.

변천

고려 혁명당은 여러 계통의 인사들이 참여한 까닭에 독립운동을 실천하기 위한 이념과 노선이 다양했다. 따라서 이 단체의 주도 인물들은 효율적인 활동을 위해 합의된 이념과 노선을 결정해 강령과 당략을 만들었다. 고려 혁명당의 이념과 노선은 사회주의였고, 독립운동을 실천할 방략은 무장 투쟁 위주의 독립 전쟁론이었다. 그런데 고려 혁명당은 강령에 사회주의를 표방하기는 했으나 단체의 최고 목표를 조국 독립운동에 두었기 때문에 조직의 분열을 야기시키고자 하는 사회주의자의 가입은 엄격히 반대하여 거절했다.

고려 혁명당은 체계적인 활동을 위해 성립된 이후, 그 해 8월까지 약 4월 동안 길림성과 봉천성 등 남만주 지역에 11개의 세포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 세포 조직은 상호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무장 활동을 위한 기반을 구축해 항일 독립 전쟁을 수행하였다. 특히 위원 정이형은 길림에 정통단이라는 특수 부대를 조직해 대원들을 이끌고 국내 진입 유격전을 전개하는가 하면, 만주 내의 친일파를 척결하고 군자금 모금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고려 혁명당은 1926년 12월 28일 위원 이동락이 장춘에서 일제의 경찰에 피체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체포 당시 이동락이 소지하고 있던 단체의 선언서·강령·당략·맹약 등을 압수한 일제는 이를 근거로 만주와 국내에서 고려 혁명당 당원들을 적극 검거하였다. 따라서 1927년 1월에는 국내에서 형평사 간부로 고려 혁명당에 가담해 있던 서광훈·장지필·조귀용과 천도교의 홍병기·송헌 등이 체포되고, 같은 해 3월 11일에는 하얼빈에서 정이형을 비롯한 정통단 단원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이 같은 피해를 입은 이후 고려 혁명당은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1927년 8월 22일부터 3일간 아성현 취원창에서 세포 연합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이후 뚜렷한 활동을 벌이지 못하다가 당원들이 1927년 이후부터 전개된 만주 지역의 민족 유일당 운동에 가담하면서 해체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려 혁명당은 지역적·이념적 차이를 뛰어 넘어 성립된 통합 항일 무장 단체였다. 고려 혁명당이 성립될 시기는 일제의 무력이 한창 성장하던 시기로 국내는 물론이고 만주와 러시아연해주 지역에서도 무장 투쟁을 펼치기가 어려운 시기였다. 따라서 모든 항일 세력을 하나로 묶어 오랜 기간 활동하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힘든 시기에 통합 독립운동 세력을 만들어 항일 무장 투쟁을 실천했다는 것은 이 단체 구성원들의 조국 광복 의지를 살펴볼 수 있는 면이다.

참고문헌
  • 채영국,『한민족의 만주 독립운동과 정의부』(국학 자료원,2000)
  • 정이형,『쌍공 정이형 회고록』, (국가 보훈처,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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