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參義府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통화현 집안시 요령성 본계시 환인만족자치현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 단체 |
|---|---|
| 설립자 | 백광운 |
| 설립 시기/일시 | 1924년 6월 |
1924년 6월 결성된 남만주 지역의 민족주의 운동 단체.
참의부는 1924년 4월 대한 통의부 소속 군대인 의용군 제1·2·3중대원이 탈퇴하여 1924년 6월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휘를 받으며 결성되었다. 이때 정식 명칭이 주만 육군 참의부(駐滿陸軍參議府)였다. 참의부는 남만주 일대에서 활동 공간이 겹치는 정의부와 경쟁하며 성장하였다.
초기 참의부의 참의장은 백광운(白狂雲), 중앙 의회 의장은 백시관(白時觀), 민사부장에 김소하(金篠廈)가 있었다. 군대는 5개 중대와 훈련대, 독립 소대로 편성되었다. 민사 조직은 집안을 비롯 13개 현(縣)에 있는 한인 사회를 관리하였다.
1926년 5월 군민(軍民) 총회에서 중앙 조직을 개편하고 중앙 의회와 더불어 군사위원회와 행정위원회를 두었다. 군사 위원장에 양규열(梁奎烈), 행정 위원장에 조인환(趙仁煥)이 임명되었다.
참의부가 행정위원회로 무게 중심을 바꾼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1925년 3월 고마령 전투에서 39명의 대원을 잃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1925년 6월 조선 총독부와 장작림 군벌이 체결한 삼시 협정(三矢協定)으로 군사 활동이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1927년 3월 참의장에 김승학(金承學)이 취임하면서 한인 사회의 자치에 비중을 두고 행정 조직의 역할을 강화하였다. 이때는 이전에 비해 활동 구역이 축소되어 환인현 통화현 집안현에 거주하는 4천 4백호 정도의 한인을 관리하였다. 이곳은 평안도 출신 이주자가 다수인 곳이어서 같은 출신지의 간부를 중심으로 조직이 운영되었다.
1928년 5월 참의부를 비롯하여 정의부·신민부 등의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반석현(磐石縣)과 흥경현(興京縣)에서 열린 ‘전 민족 유일당 조직 촉성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단체 본위 조직론을 주장하는 계열과 개인 본위 조직론을 주장하는 계열로 분열하고 말았다. 1928년 9월 정의부가 주도하여 열린 3부 통일 회의에서도 서로 자신이 정통이라 주장하며 대립함으로써 분열하였다. 일부 세력은 1929년에 결성된 국민부에 가담하였다.
참의부는 같은 시기 남만주 지역에 있던 정의부에 비해 한인의 자치와 안정보다 무장 활동에 더 비중을 둔 단체였다. 특히 국내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하고 친일파를 응징하는 한편, 일본의 통치 기관을 공격하는 활동을 벌였다. 1925년의 경우에도 압록강변초산 부근에 있는 경찰의 주재소들을 습격하고, 일본군 국경 수비대와도 싸웠다.
1925년 3월 국내 진공을 위한 작전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집안현의 고마령(古馬嶺)에서 5개 중대의 간부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다. 이를 정탐한 일본은 경찰과 군 병력을 동원하여 기습하였다. 참의부의 군대는 여기에 저항하며 기본 역량을 보존할 수 있었으나 참의장 최석순(崔碩順), 중대장 전창희(田昌禧)를 비롯해 39명의 대원이 전사하고, 고문 홍주(洪疇) 등이 체포되어 큰 타격을 받았다.
고마령 전투를 계기로 무장 활동이 주춤한 가운데, 참의부는 한인 사회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6년 1월 현재 동흥 병원 등 4개 병원과 통남(通南) 학교 등 3개의 학교를 운영하였다.
참의부는 무력 활동을 우선하는 전통이 강하여 한인에게 강박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 반발한 일부 한인은 중국 관헌에게 참의부의 동정을 전해주거나,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의무금 납부를 거부하며 반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참의부는 남만주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사회의 안정과 교육 진흥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였다. 일본의 경찰 및 군대와 정면으로 대결하며 독립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결집한 단체였다. 한편에서는 무장 활동을 강조하여 안정을 바라는 한인 대중의 요구와 충돌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