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특혁부성

한자 溫特赫部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혼춘시 삼가자만족향 고성촌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고대/남북국 시대/발해
상세정보
성격 성곽
양식 평지성
길이 동벽 710m, 서벽 710m, 남벽 381m, 북벽 468m
둘레) 2,269m
문물|보호단위등급 주급문물보호단위
현 소재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혼춘시 삼가자향 고성촌N : 42°49'7"E : 130°15'35"
출토 유물 소장처 서울시 관악구
정의

길림성(吉林省)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혼춘시(琿春市) 삼가자향(三家子鄕) 고성촌(古城村)에 있는 고구려 및 발해 시대의 평지성.

개설

온특혁부성은 고구려 때 쌓아 발해 시대에도 사용한 흙으로 쌓은 평지성이다. 둘레는 약 2.3㎞ 정도이며, 경작지 개간과 민가 건축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었다.

건립 경위

온특혁부성에서 수습된 유물을 통해 본다면, 고구려 시대에 건립되어 발해 시대에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온특혁부성은 혼춘시 삼가자향 고성촌 앞에 형성된 혼춘하(琿春河)의 충적 평야 말단부에 있다. 고성은 혼춘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약 10㎞ 떨어진 두만강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 서쪽으로 1㎞ 떨어진 곳에서는 두만강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가고 있다.

형태

온특혁부성의 평면 형태는 사다리꼴로, 흙을 다져 쌓아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전체 둘레는 약 2.3㎞가량이다. 고성의 북쪽은 금나라 성터인 비우성(斐優城)과 주택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었다. 잔존하는 성벽의 높이는 2~3m가량이다. 비우성(斐優城)을 기준으로 온특혁부성의 규모는 동벽 710m, 서벽 710m, 남벽 381m, 북벽 468m이다. 별도의 각루나 치, 옹성 등의 시설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 내부에는 남쪽 경작지를 중심으로 고구려 및 발해 시대의 유물이 확인되고 있는데, 최근까지도 다량의 기와편이 분포하고 있다. 짐승얼굴무늬 수막새와 입연화문(立蓮花紋) 또는 젖꼭지 무늬[유정문(乳釘紋)] 수막새, 팔련성(八連城) 출토품과 동일한 발해 시대의 연꽃무늬 수막새 등이 출토되었다.

현황

2012년 기준, 온특혁부성의 북쪽 성벽은 비우성과 주택 등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었다. 동쪽과 서쪽 성벽 일부 또한 훼손되었으며, 성 내부는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다. 비우성온특혁부성은 성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자매성(姉妹城)이라고 불린다.

의의와 평가

온특혁부성의 성격을 밝히려는 연구는 출토 유물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연구는 크게 고구려 성인가 발해 성인가로 나누어지며, 이 두 견해를 아우르려는 경향도 있다. 또한 고구려 성으로 인정하면서 이 성을 책성(柵城)으로 비정한 연구도 있다.

고구려 성으로 보는 견해는 입연화문 와당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입연화문 와당은 발해 초기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육정산 고분군(六頂山古墳群) 출토품의 경우 문양 요소가 다른 고구려 와당에 비해 가장 단순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입연화문 와당의 기본 문양 요소를 지키고 있는 온특혁부성 출토품은 발해 시대보다는 이른 고구려 시대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발해 성으로 보는 연구[정영진]는 온특혁부성의 동쪽벽에 대한 조사 당시 토축 성벽 내에 승문·승석문·사격자문 등의 기와편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성벽은 고구려가 아닌 발해 시대에 다시 쌓은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온특혁부성 주변에서 모골흔(模骨痕)[작은 원통과 같은 나무로 된 제작틀의 흔적]이 확인되는 고구려 기와편이 다수 확인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분명 고구려 때부터 활용된 성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입연화문 와당이 고구려 후기에 새롭게 등장한다는 점과 성 내외부에서 고구려 뿐만 아니라 발해 유물 또한 다수 확인되는 점, 그리고 비우성온특혁부성 모두 토축 성벽 내에서 고구려 기와편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등을 볼 때, 해당 성은 고구려 및 발해 시대에 지속적으로 개축되면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온특혁부성고구려 책성으로 비정한 연구의 근거로는 온특혁부성이 넓은 평지성이기 때문에 살기성과는 달리 행정 중심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 고구려 외에도 발해 유물이 다수 확인되고 있어 고구려의 책성이 발해 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다는 문헌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발해의 동경 용원부인 혼춘의 팔련성 부근에 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琿春縣文物志』(1984)
  • 연변박물관 연변문화유물략편 집필소조, 『연변문화유물략편』,(1989)
  • 鄭永振, 「연변지구의 고구려유적 및 몇 개 문제에 대한 탐구」(『韓國上古史學報』4, 韓國上古史學會, 1990)
  • 양시은, 「연변 지역 고구려 유적의 현황과 문제」(『동북아 역사 논총』, 동북아역사재단,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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