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韓樂然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문화·교육/문화·예술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화가, 정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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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 |
| 출생 시기/일시 | 1898년 12월 8일 |
| 수학 시기/일시 | 1920년 가을 |
| 수학 시기/일시 | 193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8년 11월 20일 |
| 활동 시기/일시 | 1940년 6월초 |
| 몰년 시기/일시 | 1947년 7월 30일 |
| 출생지 | 연길현 룡정촌 |
| 학교|수학지 | 중국 상해, 프랑스파리 |
| 활동지 | 중국 |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중국연길현 용정 출신의 첫 조선족 화가이자 정치가.
한낙연은 1898년 길림성 연길현 용정촌에서 출생하였다. 한낙연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다. 9세에 용정 관립 소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용정 전화국과 용정 해관 사무원으로 취직하였다.
1919년 가을 한낙연은 러시아연해주로 유학을 떠났지만, 1년 뒤인 1920년 가을 중국상해로 건너가 상해 미술 전과 학교에 입학하였다. 한낙연은 한인 최초로 1923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4년 상해 미술 전과 학교를 졸업한 그는 중국 공산당의 파견으로 심양에 왔다. 이때 이름을 한낙연이라 고쳐 부르고 국민당 당원으로 활동하면서 미술 전과 학교를 설립하였다.
1925년 7월말 한낙연은 하얼빈으로 파견되어 보육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8년 상해로 돌아가 활동하다가 소속 당 조직이 파괴되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1931년 파리 미술 학원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공부를 마친 한낙연은 네덜란드·스위스·영국·이탈리아 등을 돌아다니며 각국의 화풍을 익혔다.
1937년 중국으로 돌아온 뒤에 무한과 중경에서 동북 항일 구국 총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1940년 봄 서안에서 국민당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3년부터 1947년까지 난주와 서안 등지에서 20차에 걸쳐 미술 전람회를 열었다.
해방 후 한낙연은 1946년 4월부터 신강 고대 고창국 유적지와 커지르 천불동에 대한 발굴 정리 사업을 중국 최초로 진행하였다. 1947년 7월 30일 비행기로 적화에서 난주로 가다가 조난 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떠났다.
한낙연의 주요 작품은 「전민항전」·「노예가 되기 싶지 않은 인민들이 일본 제국주의를 소멸하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