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南世極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재남북만주 조선 민족 대표 |
| 출생 시기/일시 | 1882년 |
| 몰년 시기/일시 | 1943년 |
| 추모 시기/일시 | 1996년 |
| 출생지 | 함경북도 명천군 |
| 거주|이주지 |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 |
| 활동지 |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 |
일제 강점기 북간도 명동촌을 중심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
남세극의 본관은 영양(英陽), 다른 이름은 군명(君明)이다. 1882년(고종 19)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다.
남세극은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 1908년 김약연(金躍淵)이 세운 명동 서숙(明東書塾)을 졸업하였다. 1913년 간민회(墾民會)에 가입하여 화룡현(和龍縣) 타이라즈(太拉子) 지역 평의원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용정(龍井)에서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김약연·구춘선(具春先) 등과 함께 재남북만주 조선민족대표 17인의 일원으로 「조선 독립 선언 포고문」에 서명하였다. 1919년 5월 유하천(柳河天)과 타이라즈에서 『대한 독립 신문』을 발행해 만주 지역 한인 학교 등에 배포하였다. 간도 국민회(間島國民會)의 보조 기관인 신국민단(新國民團)을 조직해 이주 한인 자치를 위한 지원에 힘썼다.
1919년 11월 남세극은 일본 영사관 경찰의 감시를 피해 잠시 러시아령(領)에 다녀온 뒤부터는 화룡현에서 대한 국민회 남부 지방 총회 재무부장으로 활약하면서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였다. 1923년 2월에는 마진(馬晉) 등과 대한 국민회 대표로 적기단(赤旗團) 회의에 참가해 항일 무장 투쟁에 관해 논의하였다.
대전국립현충원 애국 지사 묘역-883에 안치되어 있다.
1996년 정부에서는 남세극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