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삼

한자 金東三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백서농장 장주, 국민대표회의 의장
출생 시기/일시 1878년 6월 23일
몰년 시기/일시 1937년 3월 3일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
정의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개설

김동삼은 1907년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신민회를 비롯하여 대한협회 안동지회·대동청년단 등에서 활동하며 구국운동을 펼쳤다. 1910년 8월 국망(國亡)하자, 김동삼은 제자 20여 명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이후 그는 경학사(耕學社)와 신흥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졸업생들을 이끌고는 백서 농장(白西農莊)을 세웠다. 1919년 3월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도 참하였는데 1931년 만주사변 직후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1937년 4월 순국하였다.

가계

1878년 6월 23일(음력)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부친 김계락(金繼洛)과 모친 영해 신씨(寧海申氏)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 본명은 긍식(肯植), 자는 한경(漢卿)이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한 뒤에는 동삼(東三), 자는 성지(省之), 호는 일송(一松)으로 고쳤다. 어려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전통 교육을 받았다.

활동 사항

김동삼은 1905년 20대 중반에 서울을 드나들며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1907년 3월 안동(安東)에서 류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하중환(河中煥) 등과 함께 천전리김대락의 사랑채에 중등 과정의 협동학교(協東中學校)를 설립하고, 학생을 가르치다 교감을 맡아 학교를 운영하였다.

1909년 서울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들과 만나 국외 독립운동 기지 설치, 독립군 양성 문제 등을 협의하였다. 이후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1년 1월 서간도로 건너갔다. 그곳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이시영(李始榮)·이철영(李哲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윤기섭(尹琦燮)·김창환(金昌煥) 등과 더불어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 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과 군관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그는 1911년에 류인식과 함께 통화현(通化縣)에 중어 학원(中語學院)을 설립하여 한·중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였다. 1913년 합니하(哈泥河)로 옮겨가서는 여준(呂準)·이탁(李拓鐸)·이상룡 등과 함께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재만동포의 민생·교육 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14년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고자 신흥강습소 졸업생 300여 명을 이끌고 통화현(通化縣) 팔리초(八里哨) 깊은 산속에 들어가 백서 농장(白西農莊)을 개설하고는 3년간 교육을 실시하였다.

김동삼은 1919년 길림(吉林)에서 발표된 「대한 독립 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에 서일(徐一)·여준·신팔균(申八均)·김좌진(金佐鎭) 등 39명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였다. 이후 그는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참가하였다.

그 뒤 서간도로 돌아온 그는 조직을 새롭게 정비하였는데, 부민단(扶民團)한족회(韓族會)로, 백서 농장(白西農莊) 군영을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로, 고산자의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각각 개편하였다. 그는 한족회(韓族會) 서무 사장,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한족회(韓族會)가 민정기관이라면,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는 군정기관으로 이원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김동삼은 1920년 여름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 사령관 이청천(李靑天)과 함께 독립군 300여 명을 이끌고 북간도로 이동하였다.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 독립군은 청산리 전투가 끝난 뒤 북만주 중·소 국경 부근인 밀산으로 이동하여 북간도 독립군들과 합세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하지만 김동삼은 대한독립군단이 소련 영토인 자유시로 이동할 때 동행하지 않고 서간도로 돌아와 독립 전선을 재정비하였다. 김동삼은 1920년 경신참변 당시 삼원포 삼광소학교(三光小學校) 교장으로 있던 동생 김동만을 잃었고, 청산리 전투에서 조카 김성로(金成魯)가 전사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김동삼은 1922년 6월 재만 한인 사회와 독립군 통합을 위해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주도하여 통군부(統軍府)를 결성하였고, 이를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하였다. 그는 통군부 교육부장, 통의부 총장을 맡았다. 1923년 5월에는 임시정부를 쇄신하고자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여 개조파에 가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민대표회의는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1923년 가을 만주로 돌아온 김동삼는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매달려 1924년 10개 단체대표를 모아 전만통일회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열어 의장으로 활동하였고, 그해 11월 유하현 삼원포에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켰다. 그는 정의부에서 중앙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로써 1925년 만주에는 민정과 군정 기능을 갖춘 3부가 정립하였다. 이때 이상룡(李相龍)이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임된 후 그를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김동삼은 1927년 4월 1일 정의부(正義府) 간부 30여 명과 정의부(正義府) 산하에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여 농민 생활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고, 그해 4월 15일에 길림 남쪽 영길현(永吉縣) 신안툰(新安屯)에서 민족유일당촉성회의가 열리자, 정의부(正義府) 중앙위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928년 5월 정의부(正義府)를 대표하여 삼부통합회의를 열어 대통합을 모색했으나 그러한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해 7월 김동삼은 이탈 세력을 규합하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1929년 좌우 합작을 도모하고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가 조직되었는데 김동삼은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민족유일당 결성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9년 4월 국민부가 출범하면서 민족유일당 계획은 무산되고, 1929년 5월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는 해체되었다. 이어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자 김동삼은 고문을 맡았다. 이렇듯 독립운동 단체 통합에 힘쓰던 김동삼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이원일(李源一)과 함께 북만주 하얼빈으로 옮겨가 활동하던 중, 그해 10월 초 밀고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는 1932년 10월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수감되었는데, 1933년 3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937년 4월 13일 순국하였다.

묘소

김동삼의 시신은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거두어 장례를 지냈는데, “내가 조국에 끼친 바 없으나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 달라.”라는 옥중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여 한강에 뿌렸다.

상훈과 추모

1962년 정부에서는 김동삼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안동댐 보조 광장에 일송 김동삼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 김희곤, 『안동 독립운동가 700인』(안동시, 2001)
  • 김희곤,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지식산업사, 2009)
  • 장세윤, 「1910년대 남만주 독립군 기지 건설과 신흥무관학교」(『만주연구』24, 2017)
  • 이시종, 「일송 김동삼의 역사인식과 독립투쟁」(『역사와 융합』2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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