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소촌[용정시]

한자 光昭村[龍井市]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개산둔진 광소촌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83년
변천 시기/일시 1953년
변천 시기/일시 1956년
변천 시기/일시 1958년
변천 시기/일시 1964년
성격 조선족 마을
가구수 586가구
인구[남/여] 2,253명
개설

광소촌개산둔진 소재지로부터 서북쪽으로 4㎞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종촌, 제동촌, 자동촌과 인접하고 있다. 광소촌용정시 9개 변강 마을 가운데 하나로, 9개 자연마을과 9개 촌민 소조(村民小組)를 관할하는 비교적 규모가 큰 마을이다.

명칭 유래

광소촌은 1900년 초에 설립되었으며, 햇빛이 충만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해방 전에는 광소사(光昭社)·사개사(四開社)·광개사(光開社)에 속하였다. 해방 후 1945년 11월까지 광개구(光開區)에 소속되었다가 1953년에 광소초급사(光昭初級社)가 설립되었다. 1956년에는 광소향(光昭鄕)에, 1958년에는 개산둔진인민공사 광소관리구에 소속되었다가 1964년에 광개인민공사 광소대대로 바뀌었다. 그리고 1983년에는 광소촌으로 개칭되었다.

자연환경

광소촌 동쪽에는 남에서 북으로 두만강이 흐르고, 서쪽은 중국사령(中國師嶺)의 산기슭이다. 해발 고도는 155m이고 기후가 따뜻하여 벼농사가 잘된다.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고 있는 쌀은 만주국 당시 황실에 진상하여 ‘어곡전(御谷田)’이라 불렸다. 어곡전은 길림성 용정시 개산둔진 하천평촌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인들의 벼농사가 비교적 일찍 시작된 곳이다. 이 마을에 최학출이라는 30여 세(1917년생)의 조선인 농사꾼이 있었다. 재해로 살길이 막연하여 1935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하천평으로 이사를 왔다. 당시만 해도 이 고장의 벼농사는 주로 산종을 했고 벼모 이식을 조금씩 하는 정도여서 벼의 생산량이 많지 못했다. 최학출은 몇 년간의 벼농사를 지으면서 재래식 농법으로는 생산량을 높일 수 없게 되자 당지의 한랭한 기후 조건에 비추어 대담하게 온상육모를 시험했다. 1941년 봄, 유리 창문처럼 간이 창틀을 짜서 백지를 붙이고 콩기름을 발라 햇빛이 잘 들어가도록 투명도를 높인 다음 모판을 만들고 씨앗을 뿌렸다. 이것이 바로 ‘유지온상육모법’이었다. 그 결과 모를 일찍 키워냈을 뿐만 아니라 모도 튼튼하게 자라났다.

그 해 수확량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지어놓은 햅쌀밥은 백옥같이 희고 윤기가 있어 천하진미로 평가되어 현과 간도성 농산품 전시회에 출품하여 으뜸가는 호평을 받았고 점차 전 만주에 소문이 났다. 이 소식이 당시 위만주국 정부에까지 알려지자 강덕황제는 최학출을 신경(지금의 장춘)으로 불러들여 위만주국 화폐 1,000원을 하사하고 정부에서는 땅 1,000평을 위탁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강덕황제의 수라상에 오르는 쌀을 전문 생산하는 밭을 가꾸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천자, 제후에 붙이는 높임말인 ‘어(御)’에 곡식 ‘곡(谷)’자를 붙여 밭 이름을 ‘어곡전(御谷田)’이라고 했다.

만주지역의 논농사는 이곳으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최학출은 만주지역 벼농사의 전설적 존재로 자리매김하였다. 2006년 9월 22일 용정시 개산둔진 정부는 어곡전터에 기념비를 세우고 그해부터 ‘어곡전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현황

2006년에는 한인[조선족] 인구가 2,199명으로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였다. 경작지는 718㏊이며 그 가운데 논이 195㏊이다. 주로 벼·옥수수·콩 등 전통 작물을 재배한다. 해외로 나간 인구가 132명이고 중국 내 각지로 나간 인구는 139명이다. 마을의 연총생산액은 1,095만위안으로 그 중에서 농업생산액이 658만위안으로 가장 높아 연총생산액의 60%를 차지하였다.

참고문헌
  • 『龙井县地名志』(龙井县人民政府, 1985)
  • 「农民贴心的好书记-记龙井市开山屯镇光昭村党支部书记金龙洙」(彭玉珠新长征, 2011)
  • 심혜숙·정매화, 『연변조선족마을과 건설모식』(연변대학출판사, 2009)
  • 한민족신문(http://m.hmzxinwen.com)
관련항목
관련 웹사이트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