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吳祿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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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정치가, 군사가, 혁명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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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 |
| 대표경력 | 길림변무방판 |
| 출생 시기/일시 | 1880년 |
| 몰년 시기/일시 | 1911년 11월 6일 |
1907년 연길변무방판(延吉邊務幫辦)으로서 간도 문제 해결에 나섰던 중국호북성 운몽현 출신의 청나라 관리.
오록정은 1880년 호북성(湖北省) 운몽현(雲夢縣)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은 훈장이었고, 부인은 경정숙(景靜淑)이다. 자녀로는 오충화(吳忠華)와 오충황(吳忠黃)을 두었다.
오록정은 1887년 호북 무비학당(湖北武備學堂)에 입학하였다. 1888년 호광 총독의 추천으로 중국인으로서는 첫 일본육군 사관 학교 사관생이 되었다. 당시 일본에 있던 손중산은 중국 유학생들을 혁명의 길로 이끌었는데, 이때 오록정 역시 이에 공감하여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에 참가했다.
일본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한 오록정은 1903년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로 가서 황흥(黃興)·송교인(宋敎仁) 등과 혁명 단체 화흥회(華興會)를 조직하였다. 1904년 7월 동삼성 총독인 서세창을 따라 봉천에 와서 군사 참의(參議)가 되었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는 1905년 11월부터 ‘만주 경영’에 착수하였다. 이에 동삼성 총독 서세창은 1906년 8월 길림변무독판공서(延吉邊務督辦公署)를 세우고 훈춘 부 도통(副都統, 중장급) 진소상을 길림 변무도독으로 임명하였고, 오록정을 연길변무방판(延吉邊務幫辦)으로 임명하여 도독을 도와 실질적인 사무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이런 가운데 1907년 8월 23일 일제가 중국 용정촌에 ‘통감부 임시 간도 파출소’를 설치하고, 연변을 북도소·회령 간도·종성 간도·무산 간도 등 4개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다. 이에 오록정은 일제에 ‘통감부 임시 간도 파출소’를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연길 지역을 답사했다. 오록정은 70여 일 동안 2,600여 리를 답사한 후, 「연길 변무 전도(延吉邊務專圖)」를 작성하고 『연길 변무 보고(延吉邊務報告)』를 집필하여 ‘간도’가 청나라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오록정은 북간도 한인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책을 펼쳐 ‘통감부 임시 간도 파출소’의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1910년 2월, 청 정부는 오록정을 북경으로 소환하였다. 1911년 10월 신해 혁명이 일어나자 오록정은 이에 적극 참가하여 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남쪽으로 파병한 청나라 군대에 지급할 무기를 몰수하였다. 그런데 그해 11월 6일, 오록정은 원세개에 의해 매수된 부하 마보주(馬步周)에 의해 살해되었다.
오록정의 저술로는 『연길 변무 보고』가 있다.
오록정의 묘소는 1982년 3월 석가장 장안 공원에 이장하였다. 묘역은 길이 12m, 넓이 6㎡로 조성되었다. 묘지석 정중앙에는 “고 연진련군 대장군 수경 오공지묘(故燕晋联军大将军绶卿吴公之墓)”라는 14자가 새겨져 있다.